
보통 어떤 멜로드라마(혹은 그것을 표방하는) 영화와 마주했을 때, 그 내용 자체에서 어떤 새로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영화 내부에 서린 아이디어가 조금씩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이야기의 본질 자체에서 새로움을 찾는 경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기성 멜로 영화들이 이미 쌓아 놓은 어떤 영화적 위치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에 대해서 알고, 그리고 사랑하는 과정을 담은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우주 한쪽 끝에서 또 다른 한쪽 끝까지 펼쳐 놓으면 그 자리를 빼곡하게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수 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이 멜로드라마라는 이름의 (우리가 흔히 ‘계보’라고 부르는) 탑이란 정말 높지 않던가. 말로는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원하고 바라지만 그 이야기들로 쌓여진 탑의 틈새에서 그 자체의 신선함을 찾으려 드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귀신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기이한 이야기 속 소재를 제외하면 이야기의 구조 자체는 분명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그 영화에 몰입하고, 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칭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찾는 새로운 스타일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에 쏟아지는 이런 대중의 놀라운 평판은 무엇에 기인할까.
이 어쩌면 상당히 편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평범한 멜로드라마를 관객들이 평가하게 되는 기준은 이런 절대적 상황과 마주한 순간 명백히 정해졌다. 결국 이야기의 자체적인 모습은 최소한 이 영역에서는 영화 자체를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기능 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로 뒤덮인 영화 속 구조가 얼마나 관객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마력을 가졌느냐다. 단순히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으로 치장해 시선을 압도하거나 재미를 주는 차원의 그것이 아니다. 그 영화에 튀어나오는 장면의 마디마디를 떠올리면서 소위 ‘가슴이 설레는’ 혹은 ‘나도 저런 사랑을 해 보고 싶은’ 어떤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관객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 마력의 실체다. 마치 영화 속 매개체와 실제 인간 사이를 엮는 붉은 리본의 모양새를 닮은 그것 (우리가 흔히 어떤 것에 동화된다고 하는). 소위 시네마틱 경험이라고 부르는, 멜로드라마의 어떤 역할이며 흐름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 ‘영혼’을 심는다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로 영화의 틀을 잡아 놓았다면 그 뼈대를 수놓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화 속 감정선의 조율, 즉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부여하는 일련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영혼’이란 단순히 영화 자체의 따뜻하고 차가운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관객들이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고 머릿속을 지배당하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의 실체다.
이런 점을 들어 이야기하자면 유하 감독의 <쌍화점>은 매력적이라고 하기에 어려움이 따르며 심지어 불편함을 안겨 주는 작품이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보기 힘든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비교적 이해할 수 있게 명확히 구성되어 있고, 숨 가쁘게 전개되는 중반부 이후의 장면들이나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비주얼적인 볼거리는 훌륭하다고 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요깃거리가 되는 요소들이라는 것은 거부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눈에 담은 133분이라는 시간 동안에 보이는 것들을 그저 불편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사항들을 다시 되짚어 이야기해야 한다.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눈길을 단박에 이끄는 이 한 편의 치정사극에는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앞에서 얘기했던 감정선의 적절한 조율, 즉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비주얼 상의 화려함이나 매혹적인 색채, 쉴 새 없는 스펙터클 등의 요소는 최소한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목이 되지 못한다. 특히나 <쌍화점>처럼 극의 소재가 사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라면 어느 정도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방향으로 갈 것임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기에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지금도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TV 사극들을 떠올려 보자.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화려함을 표방하고 있으며 시청자들은 그 비주얼의 충격에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쏟아내곤 한다.) 이런 기본적인 영혼의 부재는 너무나 눈에 확연히 들어오고, 관객으로 하여금 뼈아픈 느낌까지 유발시킨다.
그 영혼의 부재가 드러나는 가장 큰 부분이자 가장 결정적인 타깃은 명백히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을 일곱 차례의 정사신 (왕과 홍림의 동성애 신 포함) 과 그 장면들로 이어지는 왕(주진모 분)-왕후(송지효 분)-홍림(조인성 분) 라인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실질적으로 여자를 품을 수 없는 왕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인 홍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그 양 옆에 왕과 왕후의 불편한 관계가 뒤얽힌다. 그리고 여기에 소위 씨내리라고 부르는 (영화 속에서는 대리합궁이라고 부르는) 테마가 합세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 구조 자체는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꽤 견고하게 다가온다. 구조 자체는 무난하지만 이 구조 자체보다 중요하게 논의될 문제는 이 구조를 어떻게 뒤덮어 관객들로 하여금 그 상황을 납득하는 개념을 넘어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쌍화점>은 본질적으로 흘러가야 할 방향을 다소 크게 벗어난다. 보통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드러나곤 하는 남녀의 만남 -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소통(흔히 관심과 대화라는 모든 것을 포함한) - 맺어짐의 과정을 이 영화에서는 종종 건너뛰어 버리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특히 왕후와 홍림의 대리합궁 장면은 너무 급진적인 리듬으로 어수선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분위기 그대로 이어져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상호 소통 단계를 중간에 끼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극중 왕후가 홍림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몇 마디의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으나, 이것마저도 왕후가 홍림에게 쏟는 일방적 소통에 지나지 않으니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공감대를 획득할 수 있는 많지 않던 기회마저 없어지고 만다. 분명 중간에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그 과정이 축소 내지 거세된 것은 <쌍화점>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쌍화점>처럼 정사신이 단순한 정사신이 아니고, 으레 그와 함께 딸려 나타나는 남-여간 소통이 관계 자체에서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하는 (가령 김진아 감독의 <두번째 사랑>과 같은 부류의)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객들은 왕후와 홍림의 관계를 어떤 연정의 표현이 아닌 그저 육욕의 관계쯤으로 이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을 타고 난 뒤 후반부에 등장하는 ‘연정’ 이라는 단어에 어색함을 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모름지기는 아니더라도 연정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되어야 더 멋들어진 표현이 되지 않던가. 소통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이 원초적 성행위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연정이 이야기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서 혹자는 관계를 통해 연정을 품을 수도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연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단순한 몸의 탐닉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정이라는 테마 안에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할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앎 등이 결여된 연정이란 소위 말하는 파트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 자체를 두고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야 없겠지만, 다소 서투른 느낌의 구조가 문득 거부감을 들게 하는 것은 확연한 사실이다.
가장 전면에 내세웠던 정사신과 삼각 라인이 매우 아쉬운 방향으로 귀결되면서 자연히 이야기의 중심은 비주얼과 액션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물론 비주얼과 액션 그 자체는 꽤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이미 영혼을 담아 뒤덮였어야 했을 가장 앞쪽 중심이 무너진 까닭에 그 공을 들인 비주얼이나 액션마저 온전히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결과로 돌아오며, 오히려 삼각 라인에 너무 과한 에너지를 쏟아 넣은 나머지 다른 요소들이 그에 구속되는 느낌마저 든다. 애초부터 세 사람의 위험한 관계와 성에 대한 요소들을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주축으로 삼고 있었으며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중심이 무너지는 순간 다른 요소들 역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막대 하나를 무너뜨리면 나머지 막대들도 따라 무너지는 도미노와 같이, 이미 앞 단계에서 무너지기 시작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요소들 역시 제 역할을 온전히 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며, 이로 인해 꽤 흥미로운 (아니, 흥미로울 뻔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이야기 자체가 다소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이 부분만이라도 밀도 있는 방향으로 전개하여 120분이 조금 안 되는 분량으로 줄여 보여 주었다면 보다 아쉬움이 덜하지 않았을까.
<쌍화점>을 보면서 유일하게 느낀 미덕이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중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그 영화 자체에 어떤 영향이 돌아가는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한 사례로 기억되었다는 점이다. 일전에 한 평론가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졸작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잠깐 하게 됐는데, 그 때 들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보기 싫어도 졸작을 보게 되면 그 작품이 왜 졸작이고 그와 상반되는 다른 작품이 왜 좋은 작품인지에 대해서 보다 명확히 알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쌍화점>은 그저 의미 없는 팬심을 겨냥한 팬시상품쯤으로 여기고 넘어갈 작품으로만 치부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 내용 자체는 실패적일지라도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괜찮은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안 좋은 작품인지, 그리고 다른 작품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가려내는 잣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은 한국영화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의 역할로도 직결될 수 있겠다. 불행히도 이런 미덕을 빼면 그다지 남는 게 없다는 결정적인 사실이 문제지만 말이다.
결국 <쌍화점>은 그 속에 담뿍 담고도 남았어야 할 이야기 속에 살아 숨 쉬는 영혼을 미처 다 살려 내지 못한 끝에 관객들이 다가와도 성큼 그 앞으로 다가앉기에는 힘든, 한 마디로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차가운 영화로 스크린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좋은 소재를, 그 좋은 요소들을, 혹은 그 좋은 비주얼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것을, 어디에다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새삼스레 재확인한 말이 있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가르침인 그것, ‘관객은 자신이 기존에 경험했던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원하는 법’ 이라는 것 말이다. 어찌 보면 가혹하지만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난 그저 내 자신이 수 년 전 경험했던 무언가를 뛰어넘는 결과를 보고 싶었을 뿐’ 이라고.
쌍화점 (2008)
POSITIVE 35%
NEGATIVE 65%
이성지수 ★★☆ (검은별 5개 만점 기준)
감성지수 ☆ (검은별 5개 만점 기준)
전체별점 ★★★ (검은별 10개 만점 기준)
ⓒ 진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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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관심이 갔었는데 정작 개봉할 때는 워낙 조용해서
못보고 지나쳤습니다.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꼭 보고 싶어지네요.
트랙백 타고 와서 좋은 글 읽고 가게 되어 기쁩니다.
건강한 하루 되시길~
저야 저 작품의 영향력을 무지막지 받은 인간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떠올랐으니까요. 특히 그 홍림의 씨내리 장면은 말이에요.
당연하다는 듯 영화를 보면서도 두 작품을 무의식중에 비교하게 되더군요.
당시 아마 <검은집> <트랜스포머>의 포스에 밀린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마케팅이나 배급 차원의) 서포트를 덜 받았으니까요.
합작영화라는 메리트가 있어도 엄연히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어디쯤이었으니... 관객들이 상대적으로 덜 몰리는 것도 납득이 갑니다.
그래도 작년 2~3월에 재상영도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만족한 영화였어요.
그래서 <쌍화점>의 결과가 아쉽기도 하고 말이죠. 대체 그 좋은 스타일을 왜 살리지 못한 거냐!! 투덜투덜댔습니다 ㅜ.ㅜ
좋은 의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에 적극 공감합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와 주변 것들의 연결고리를 설정하고 전개하는데 부족함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글 잘 읽고 갑니다~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쉬타카님 리뷰 잘 읽었어요~
왠지 다른 분들 생각도 들어 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 지금 메타사이트 등에 보이는 리뷰들도 조금씩 극이 갈리는 것 같더군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뭐...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다구요.
역시 영화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감상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양한 의견이 있어서 조금만 조심하면 영화를 보고 나서의 즐거움이 큰 듯 하네요.
제가 역시 너무 기대를 많이 하고 간 모양입니다 ㅠ.ㅠ
음, 의견 주신 건 잘 읽었습니다. 정리하면 감정의 혼동.. 정도로 해석이 되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배우의 마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배우들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어째서인지 저는 배우가 벗은 것 자체로는 감흥을 못 느껴서 ㅎㅎㅎ;;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벅.
사실 혹평이 상당히 지배적인 축에 속하는 영화라서,
비교적 좋게 보신 분들 생각도 한 번 들어 보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
역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평이 엇갈리네요.
트랙백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 저도 이렇게 글을 써보고 싶네요. 정말 좋은 글 보고 갑니다!!!
육욕이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모 매체의 인터뷰에서 언급이 되었던 부분이었죠.
씨네21의 유하 감독 인터뷰였나.. 그랬을 겁니다.
애정신이 단순한 애정신이 아니라 육욕의 탐닉이라는...
물론 육욕이라는 것을 탐구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후반부 엄한 대사들은 너무 심했어요 ㅜ_ㅜ
갑자기 사모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아주 적응이 안되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