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올해도 성탄절이 어김없이 다가올 준비를 하고 있다. 커플부대원들에게는 아주 황홀한 나날일 것이고, 솔로부대에게는 복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 가혹한 날이겠지. 아무튼 여차저차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성탄절을 혼자 보내게 됐다. 다만 사정이 좀 달라졌다. 작년은 커플부대임에도 부득이 혼자 보냈던 거였고, 올해는 완전 솔로부대가 되어 성탄절을 보내게 됐으니까. 근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니까 작년 성탄절, (지금은 결별했지만) 당시 사귀던 애인과 오전 9시 30분 조조 상영 <과속스캔들>을 보러 가기로 했었다. 이미 난 이 영화를 일전에 본 상황이라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성탄절에는 코미디가 최고지! 라며 영화 관람을 결정했었다. 9시에 인천 CGV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일산호수공원으로 이동해서 더 놀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마침 영화를 볼 장소인 인천 CGV와 파주발 3000번 버스의 기착지인 인천터미널과의 거리도 좁았으니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기!
그리고 성탄절 당일. 집 근처에서 한겨레신문 한 부를 사고 바로 인천 CGV로 출발하여 도착하니 9시다. 원래 시간을 철썩같이 지키는 편이지만 간혹 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일찍 도착해서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맞추었군. 하며 그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역시 성탄절 조조영화 물결은 무지막지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9시 10분이 지나고, 9시 20분이 지났는데도 애인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슬슬 입가가 말라간다. 뭔 일 있는 거 아냐? 하는 생각과 설마 이번에도 약속 시간에 늦는 건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 봐도 되지도 않고, 입장은 진작에 시작됐는데 정작 같이 보기로 한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갑갑하던 차에 9시 30분 임박해서였나. 드디어 애인과 연락이 닿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말인 즉슨...
지금 집에서 출발했으니 바로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머리 한 켠이 펑 하고 터지는 순간과 마주쳤다. 그렇게 출발해서 극장으로 온다고 해도 상영관에는 아예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상영관 입장은 영화 시작 시간 10분까지만 가능하니까. 화가 치밀었지만 이성이 곧바로 제한을 걸었고, 홧김에 그냥 나오지 말라고 해 버렸다. 속으로는 이빨을 부득부득 갈면서 말이다. 더 화가 났던 건 미안하다고 하는데 말에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나. 더구나 이렇게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교제 기간 동안 한두번이 아니었던지라 더 그랬나 보다.
여하간 결국 그 날 영화도 보지 않았고, 일산호수공원은 혼자 갔다. 같이 가면 근처 웨스턴돔 내부의 맛집 한 곳을 데려갈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틀어졌고. 단단히 기분이 심란해져서 누구라도 불러서 호수공원에서 같이 놀고 싶었으나 내 처지가 우스워서 차마 부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라도 좋으니 영화를 보는 편이 더 나았겠다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겠지.
사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까칠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하며 삭이는 경우도 더러 있고. 그래도 늦겠다고 어느 정도 언질은 해 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당사자는 몰라도, 나는 그 상황이 너무나 갑갑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 마주쳤을 때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낄 거라 믿는다. 그러니, 이번 성탄절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한, 혹은 좋아하는 사람과 한 약속을 지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한껏 달뜬 성탄절에 행복한 마음 대신 생채기만 남는다면 그것 참 우스운 일일 테니까. 아, 물론 성탄절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도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다면 더 좋겠고.
200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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