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The Ruins) - 스콧 스미스

Posted at 2009/09/25 17:52// Posted in 책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이 소설의 영화판 <루인스>의 시놉시스를 보자. 의대 입학을 앞둔 제프와 그의 여자친구 에이미, 에이미의 친구 스테이시와 그녀의 남자친구 에릭이 등장하고, 이들은 멕시코(소설에서는 코수멜) 관광을 왔다가 독일인 마티아스를 만나고, 마야문명 고대유적지에 갔다가 실종된 그의 동생 하인리히(소설에서는 헨리히)를 찾기 위해 마야문명 고대 유적지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그 공간 안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왜냐고? 그 공간 안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큰 위험이 닥쳐올 것임을 어느 정도 간이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 공포를 만드는 덩굴의 정체를 바로 알지 못했을지라도.

 본격적으로 원작 소설 <폐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이 책은 혹자에게는 온갖 엽기 상황이 눈을 침공하는 사악한(?) 소설로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타액이나 혈액, 몸 등을 숙주로 삼아 끊임없이 성장하는 덩굴의 설정부터가 겁을 집어먹게 하거니와, 그 직설적 묘사는 더욱 식겁하게 한다. 특히 후반 정신없이 몰아치는 100여 페이지의 향연은? 섬뜩함. 이 말로밖에 표현이 불가능하다. (소설에서는 이탤릭체로 표기된) 덩굴이 인간의 목소리를 흡수하여 내보내는 메아리의 동어반복은 이런 공포에 한 꺼풀의 무게를 덧씌우며, 종장에 이르러 자신의 몸을 깎아내기에 이르는 여섯 사람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그 기현상을 상상하게 만들어 절로 소름이 돋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런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하나 살펴보자.

처음에는 장딴지의 부푼 부위를 째기 시작했다. 쉬운 작업이었다. 나이프로 조금 금을 낸 다음, 피부 바로 밑에서 거의 호두만한 크기에 단단히 또아리를 튼 덩굴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몸에서 그걸 꺼내 옆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팔뚝 절개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복잡한 작업이었다. 벌레처럼 부풀어 오른 곳을 약간 짼 다음, 막 그걸 찾아내려는데... 없어졌다. 에릭은 나이프 끝으로 쿡쿡 찔러 본 다음,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예리하게 쭉 그었고,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절개선은 더욱 길어졌다. 덩굴이 거기에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따라서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그는 더 깊이 절개하기로 마음먹었고, 이제는 거다란 절개선 양 끝에서 수평으로 금을 긋고는 피부를 쭉 들어냈다. (중략) - 522페이지 중에서

 (어쩌면 독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을 수도 있을)독자를 현혹시키는 현란한 묘사를 철저히 배제하는 대신, <폐허>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생물의 무서운 일면을 발견하고 빠져나가려 아등바등하다 결국 그 상황에 굴종하고 마는 인간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주인공 중 네 명이 미국인이고 그들의 공포가 가장 크게 엿보이는 까닭에 얼핏 보면 ‘어리석은 미국인들’의 연장선상과도 같다. 무리는 아니다. 덩굴에 포위당하고, 마야인들의 방어막에 가로막혀(아마도 그들은 이 덩굴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똑똑히!)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빠져나가 보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찰나의 실수로 인해 줄곧 위험에 내던져진다.

 그러나 단순히 ‘미국인의 삽질‘쯤으로 치부하기에는 <폐허>가 주는 경고가 너무나 굵직하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미국인‘이라는 틀에 사로잡혀 <폐허>가 진짜 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고? 이것은 한 인종의 이야기를 넘어,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던지는 보다 깊숙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공간에 위험하게 발을 들이밀지 마라. 그러다간 다쳐! 작가 스콧 스미스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는지. 이 책의 끝에 이르러 보여 주는 것은, 앞서 덩굴의 늪에 빠져든 친구들의 행보를 (어쩜 그렇게! 싶을 정도로)똑같이 답습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 악몽은 한두 명쯤 죽어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바로 우리 앞에서 꿈틀대며 위협하는 공포의 그림자. <폐허>가 내리는 결론이다.
(2009.09.25 / zinsayascope.com)

* 초반에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 소설은 이미 북미에서 영화화되었다. 시놉시스만 보면 원작에 꽤나 충실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흥미로우나, 불행히도 한국에는 개봉하지 못하고 DVD로 직행했다. 작년 개봉한 영화 <롤라>에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매력을 드러낸 바 있는 로라 램지가 미국인들 중 한 명인 스테이시 역을 맡아 더욱 눈길이 간다.

http://www.zinsayascope.com/trackback/296

  1. 2009/10/04 15:50 [Edit/Del] [Reply]
    진사야님 블로그는 즐겨찾기로 추가했었는데..
    댓글 남기는 건 처음 같네요~ㅎㅎ

    평소에 스릴러 소설들을 좋아하는터라...이 소설을 읽었는데 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었어요. 사실 초반부는 좀 지루하기는 했는데 읽다보니 무척 흥미진진하더라고요.

    스콧 스미스의 오래된 책인 『심플 플랜』도 번역이 되었길래 읽었는데 이 책도 재밌었어요. 이 책도 영화화되었는데, 영화는 <루인스>보다 <심플플랜>이 더 재밌더라고요.

    앞으로는 자주 댓글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ㅎㅎ잘 부탁드려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10/04 21:00 [Edit/Del]
      RR님, '심플 플랜'은 곧 책이 도착하면 읽을 예정이랍니다. '폐허'가 너무 좋았던지라 이 작품도 기대 중이에요. RR님 말대로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는걸요?
      아이구-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댓글을 남겨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