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무겁지 않게 즐기는 돈의 향연
<황금시대>는 제목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돈(money)을 주제로 한 10편의 에피소드가 쉼 없이 돌아가는 옴니버스 영화다. 각 에피소드 속에서 비춰지는 돈은 빳빳한 초록빛 지폐가 되기도 하고, 잔뜩 낡아빠져 어디선가 구심점을 잃고 떠돌기만 할 수도 있는 10원짜리 동전이 되기도 하며, 언젠가 쓰임받기 위하여 꽁꽁 모셔져 있는 은빛 동전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무형적인 존재로 변신하여 시종일관 우리를 압박하고 있기도 하는 돈의 존재를 열심히 따라가는 10편의 이야기. 이들은 일관된 주제 하에 각기 다른 방향의 장르로 뻗어나간다. 뮤직멜로에서부터 이슈드라마까지, 공포특급부터 격정의 청춘영화까지.

<유언 Live>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최익환의 <유언 Live>는 돈을 잃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두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생중계하기로 다짐하고 실천에 들어가는 이야기의 영화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카메라는 한 곳에 결박되어 있고 그 앞에 선 두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므로 한 편의 짧은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자살 시도 장면은 앤디 라일리의 <자살토끼>를 연상시키기에 쓴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남다정의 <담뱃값>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일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일 사이의 격차가 빚는 위선의 그림자를 지독하리만치 따라간다. 일정한 보답을 주고 불법적인 상황에 학생을 내맡기는 여기자(김은주)가 나오고, 이 여기자는 카메라로 그 현장을 찍어 방송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정작 실제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위선의 섬뜩함을 본다. 아무런 변명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기에 섬뜩함은 더욱 배가 된다.

<동전 모으는 소년>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권종관의 <동전 모으는 소년>은 종이 지폐 하나에 배반당한 무수한 동전들의 반란을 담았다. 사용처를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떨어진 동전을 주워 모으는 소년(기파랑). 드디어 그 동전의 사용처를 정하고 설레어하지만, 그 무수한 동전들은 폼이 안 난다는 이유로 녹색 빛 지폐에게 이내 TKO패를 당하고 만다. 이런 불편한 진실이 까발려진 이후 휙 하고 지나가는 라스트신은 제법 흥미로운 반란의 꼴을 갖추고 있다. 내 가치도 들여다 봐 달라. <동전 모으는 소년>이 부르짖는 메시지다.
이송희일의 <불안>은 주식으로 돈을 날린 남편(박원상)을 바라보는 아내의 모습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영화다. 대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싶을 정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대신, 아내의 낯빛 표정이 그 자리를 충실히 메워나간다. 아내 역을 맡은 박미현의 내공이 얼핏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안>은 온 얼굴에서 표현되는 불안의 아우라가 얼마나 큰 파장을 남길 수 있는지 어느 정도 증명하는 단편이다.

<톱>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담뱃값>이 현실과 얽힌 공포를 그대로 갖다 꺼내 놓았다면, 김은경의 <톱>은 약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공포를 선물한다. 목적을 밝히지 않고 톱을 사려는 여자(주은)가 등장하고 철물점에서 일하는 남자(유연석)는 그녀에게 톱을 팔아야 한다. 영화는 여자가 왜 톱을 원하고 어디다가 쓰는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관객들은 톱의 사용처에 대해서 눈치를 어느 정도 챌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나 효과를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극을 잘 이끌어나가며, 오소소소 소름을 돋게 하는 매력이 존재한다.
양해훈의 <시트콤>은 TV드라마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공간 안에서 아웅다웅 부대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철거민과 관련된 설정이 바깥에 깔리고 복수극의 형태를 끼고 있지만, 이야기는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꾸 흘러간다. 만약 이 단편을 한 마디로 정의하여 아이러니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극의 속성 때문이리라. 서큐버스(크레딧에서는 악마라고 나온다만) 코스츔을 하고 등장하여 재미있는 인상을 남기는 소유진의 모습이 반갑다.

<신자유청년>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채기의 <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는 노숙자의 일상을 다룬다. <황금시대> 속의 단편들 중 돈의 영향력이 가장 적게 느껴지는 단편이자 유일한 흑백 단편이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극의 꼴이 약간 김이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 약점에도 열심히 움직이는 남자(조성하)의 모습으로 인해 힘을 받는다.
52주 연속 로또 당첨자의 환희의 일면과 나락의 일면을 동시에 보여 주는 윤성호의 <신자유청년>은 (있는 자에게 약하고 없는 자에게 강한)돈의 이중인격을 시종일관 유쾌한 방향으로 보여 준다. 화려한(!) 엑스트라의 향연으로 일찌감치 화제가 되었지만, 이 단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주인공 임경업(임원희)의 행각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느냐다. 다소 낯선 다큐멘터리 형식의 단편 속에서 임경업의 행각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Penny Lover>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김성호의 <Penny Lover>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다른 단편들과 달리 오로지 서정적인 분위기로만 밀고 나가는 단편이다. 얼핏 보면 통속적인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떨어진 섬처럼 유달리 눈에 띈다. 이런 속성이 자못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하지만, 남들에게는 천대받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십 원짜리 동전을 통해 추억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모습이 흥미를 자아낸다. 동전에 대한 추억이 하나라도 있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리라.
김영남의 <백 개의 못, 사슴의 뿔>은 서로가 난처한 상황에 빠진 노동자 미숙(조은지)과 사장(오달수)의 기묘한 관계를 다룬다. 채무 문제에 대한 대담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만담이 되어 버리고, 그 뒤로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진다. 한 쪽은 돈을 원하고, 다른 한 쪽은 돈을 주지 못하는 상황. 좋든 싫든 한 배를 탄 신세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이 김영남 감독의 전작 <보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 개의 못, 사슴의 뿔> 중에서 | ⓒ 전주국제영화제 JIFF, 인디스토리, 상상마당
전체적으로 돈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허구를 짚는 경향을 띠고 있어 아이디어 부족이라는 지적에서는 자유롭지 못한다. 돈의 다른 일면을 비추기 위한 애초 목표는 꽤 잘 살리고 있는데다 각자의 가는 길이 완곡하여 이런 의심이 어느 정도 가려지기는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유일하게 서정성 하나만 가지고 열심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Penny Lover>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아이디어에 대한 충분한 지원사격 역시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남겨놓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각 단편들 간의 질 편차가 적은 편이고 현대 한국사회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세계관을 흡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힘을 빼고 접근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는 관객들에게 분명 이점으로 작용하는 점이다. 무겁게 흘러갈 소지가 있음에도 편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 맛’을 원 없이 즐겁게 접하고 싶은 관객에게 <황금시대>는 분명 가치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 (Rate 7.0)
(2009.09.17 / zinsayasco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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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현씨던가요, 암튼 여배우의 표정이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