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들)의 한탕 파티
한 소년이 아이들의 한가운데에 마주선다. 머리 위에 물음표(?) 말풍선을 달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 소년은 신기한 걸 보여 주겠다고 한다. 돈을 주면 뭔가 재미있는 걸 보여 주겠다는데 가릴 것이 있겠나. 너나할 것 없이 이 소년에게 코묻은 돈을 내놓기 시작한다. 약속대로 그 아이들을 동굴로 데려간 소년. 순간, 동굴 속에서 알 수 없는 하나의 빛이 스며든다. 저건 영락없는 도깨비불이야! 라고 생각한 아이들, 자기 몸에 더러운 흙탕물이 묻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들어간다. 하지만 그 불빛의 정체는 손전등이었고, 손전등을 들고 있는 자는 예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소년의 동업자(!)이자 형이다.

명백한 사기 행위이언만 그들의 눈에는 이 행위에 대한 가책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이 친구들에겐 하나의 유희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행위 자체를 섣불리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사기 행위에는 으레 성인들의 세계에서 엿볼 수 있는 허영이 빠져 있다. 그저 그 행위로 자기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만 마련하면 그만이다. 머리에 쓴 검은 중절모와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정장, 그 모두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자기 모습을 최소한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금전 말이다.

자, 그 소년들이 어느 새 나이를 먹어 30대쯤 되는 성인이 되었다. 나이를 먹는 동안 수많은 시간이 흘렀겠지만 하는 역할은 어째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손전등을 들고 걸려든 친구들을 현혹하던 소년은 스티븐(마크 러팔로)이라는 이름을 달고 여전히 이 거창한 사기꾼 형제의 윗단계에 군림하고 있으며, 아이들 앞에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던 소년은 블룸(에이드리언 브로디)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 형 아랫단계에서 사람들을 꼬여내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사람들은 블룸 형제(Brothers Bloom)라 부른다.

예전과 대비해 달라진 것이 있느냐고? 몇 개 있긴 하다. 더 이상 나만 죽기 싫다며 사기 행위를 그만두려 하는 블룸의 모습이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는 백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하고 있다는 점 정도? 허나 그 방법이나 흘러가는 모습만 바뀌었을 뿐 그들의 사기행각이 품고 있는 본질은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뭉치의 돈다발을 쥐는 것, 라이언 존슨이 <블룸 형제 사기단>을 통해 보여 주는 사기꾼으로서의 블룸 형제의 초상은 애석하게도 이게 다다. 돈가방이 오가지도 않고, 거대한 음모가 오가지도 않는다. 그저 한두 장으로 된 사기 과정 시나리오와, 그로 인해 축적된 한 뭉치의 돈다발만이 오갈 뿐. <블룸 형제 사기단>에서 그려내는 블룸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으레 생각할 수 있는 사기꾼의 허영심을 떠올릴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단순화된 단서들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그들이 영화 속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인이 있으니, 바로 석유재벌 상속녀 페넬로페(레이첼 와이즈)다. 맙소사, 마지막 사기 대상으로 선택한 사람 이름이 정숙함의 상징이라니. (penelope:그리스 신화 속 율리시스의 아내로, 정숙한 아내의 상징) 대략 그 흑심(!)이 납득이 가는 캐릭터 설정이다. 그저 정적인 이미지로만 살면 재미가 없지. 어디 그렇게 뻣뻣하게 갈 수 있나 두고 보자. 스티븐과 블룸은 이 여인의 도도함을 시험해 보자며(!!!!!) 작당하기 시작한다.

하던 대로 블룸이 떡밥이 되고, 스티븐은 뒤에서 시나리오를 조종한다. 헌데 이 여인, 상당히 만만치 않다. 대체 여지껏 자기 욕구를 어디다가 숨겨 놓고 안 보여 줬던 것일까(아니,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건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상대방의 취미를 수집한다는 특이한 성향에서 이미 눈치를 챘어야 한다. 자기에게 날아온 떡밥을 되려 자기가 맛나게 삼켜 버리다니. 당연히 블룸 형제의 계획은 돌돌 말려 풀기도 힘든 털실마냥 마구 꼬이기 시작한다.

이런 마구 꼬이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 <블룸 형제 사기단>은 사기꾼으로서 품을 법한 허영을 보여 주는 것엔 관심이 없다. 이 블룸 형제를 어떻게 페넬로페와 연결시켜 계획이 일그러지도록 만들까를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 모습이 결코 웃지 못할 풍경임에도 절로 피식 웃음이 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계획된 설계에 기반한다.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으려 하지 않기에 스크린의 모습을 체화하기에 무리가 가지 않고, 모든 유머가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된 유머들(특히 키쿠치 린코가 연기한 뱅뱅의 모든 행동)은 흥미로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각 캐릭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각 자리를 명확히 지키는 캐릭터들의 힘 역시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특히 주인공인 스티븐과 블룸 못지 않은 활동의 스펙트럼과 역동적인 재미를 선물하는 페넬로페 캐릭터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기하고 있는 레이첼 와이즈의 모습은 <블룸 형제 사기단>의 가치를 한 단계 윗단계로 올려놓는다.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가장 절정을 달리는 중반을 지나 마치 끝날 듯 안 끝나는 후반 장면을 스치면서 이야기는 다소 늘어진다. 특히 타겟과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블룸 형제 내부 규정을 밟고 페넬로페와 사랑에 빠지는 블룸의 모습이나, 스티븐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준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기왕에 보여 줄 장면이라면 좀 더 짧게 보여 주는 것이 관객으로서는 더 보기 편했을 것이다. 허나 이런 구성상의 약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블룸 형제의 고난사를 즐긴다면 분명 일정 수준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블룸 형제의 사기 과정 시나리오 각 단계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노출시키는 화면 속 모습은 영화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 이상의 재미를 선물한다. 때로는 이 유쾌한 사기꾼들의 한탕 파티를 즐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이언 존슨 감독의 전작 <브릭>만큼 눈에 띄는 족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유쾌한 모습을 최소한 잃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블룸 형제 사기단>은 상업영화로서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
(2009.06.18 / 진사야 / zinsayascope.com)


'09 6-3 LINEUP (기대지수 / 관람후지수)
<블룸 형제 사기단> 4.5 / 3.5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 4.0 / -
<걸어도 걸어도> 3.5 / -
<쉘 위 키스> 3.0 / 3.0
<약탈자들> 2.5 / -
<맨 어바웃 타운> 2.0 / -
<신주쿠 사건> 1.5 / -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0.5 / -

http://www.zinsayascope.com/trackback/225

  1. 영화 "블룸 형제 사기단(The Brothers Bloom)" (2008) // TASTORY : 타스토리! 2009/06/19 02:30 [Delete]
  2. 블룸형제 사기단_자신의 진짜 삶을 꿈꾸는 사람들 // 완득이네 골방 2009/06/19 10:10 [Delete]
  3. 블룸 형제 사기단 / The Brothers Bloom (2008) // 모베터블로그 2009/06/22 03:03 [Delete]
  1. 2009/06/18 21:27 [Edit/Del] [Reply]
    앗 보셨군요..
    부운영자 모군이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하고 봤는데....
    자기가 생각했던 것 만큼은 안나와서....
    그냥 평균점수 준다고하던데....
    진사야님 평점 보니까 모군하고 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 내일 보러 갑니다...
    영화 리뷰 올리는 영화는 무조건 다 봐야된다는
    규율 아닌 규율이 있어서 시간 내어서 달려갑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18 21:35 [Edit/Del]
      무비조이님, 저도 기대했던 작품인데 좀 더 잘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좀 남아요. 그래도 초중반에서 유쾌하게 웃고 나왔으니 큰 불만은 없지만요 :-)
      보시고 나서 어떻게 보셨는지도 꼭 알려주세요 ㅎㅎ
  2. 2009/06/18 23:41 [Edit/Del] [Reply]
    보려고 대기중이었는데, 리뷰보니까 나쁘지 않으셨나보네요. 저도 기대를 많이 하고는 있는데, 그냥 가벼운 맘으로 다녀와야겠어요. ㅎㅎ 감사해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19 10:07 [Edit/Del]
      철이님, '심심풀이 땅콩'이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 너무 많은 걸 찾으려 들지만 않으면 꽤 재미있어요.
  3. 2009/06/18 23:47 [Edit/Del] [Reply]
    상당히 보고싶은 영화입니다.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흐흐.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19 10:08 [Edit/Del]
      EastRain님,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마크 러팔로, 레이첼 와이즈와 키쿠치 린코의 모습을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나죠. ㅎㅎ
  4. 2009/06/19 02:34 [Edit/Del] [Reply]
    아앗! 저 포스터 스타일~ 고전적이고 멋지네요. ㅎㅎ
    전 언뜻 보고 원작이 고전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
    엉뚱한 페넬로페... ㅎㅎㅎ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19 10:09 [Edit/Del]
      만물의영장타조님, 정말 페넬로페는 이 영화에 생명을 주는 힘입니다. 물만난 고기마냥 정말 잘도 뛰어놀더군요 > <
  5. 2009/06/19 17:10 [Edit/Del] [Reply]
    호곡 저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 영화스타일은 아니더라구요...
    제가 만약 평점을 주었다면 재미도-6점 작품성-6점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좀 황당하기도 하구요 ㅠㅠ

    음 브릭은 상당히 좋았는데.. 이번 작품은 생각만큼 앞서가지는 못한 것 같아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19 21:35 [Edit/Del]
      무비조이님, 후반이 좀 황당하긴 하죠 ㅠ.ㅠ 후반도 초중반처럼 쿨하게 갔다면 더 상찬을 퍼부어 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6. 2009/06/20 01:53 [Edit/Del] [Reply]
    저 볼건데~ 내용 있는거 같아서 그냥 스크롤 휙 내렸어요ㅋㄷ
    저도 보고 리뷰 남기겠습니다~ㅎ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20 18:27 [Edit/Del]
      Design_N님, 뭐 치명적인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내용 앞부분 언급이 좀 거슬리기도 하겠군요. ^^;; 아무튼 감상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7. 2009/06/22 03:04 [Edit/Del] [Reply]
    저런 포스터도 있었군요. 모르길 다행입니다. 더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6/22 21:58 [Edit/Del]
      다이나모님, 네이버 영화란에서 찾은 이미지입니다. 다음에는 없더군요 ㅎㅎ 메인포스터보다 저게 더 마음에 들더군요. 영화 속 모습과 살짝 어긋나서 그렇지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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