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에 대한 묘사가 있으니 아무것도 안 듣고 영화 보러 가실 분들은 가급적 피해가시길 바랍니다 :-D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를 두번째로 보는 날, 상영관 입장 몇 분을 앞두고 느닷없이 커피가 땡겼다. 극장 VIP 라운지에 비치되어 있는 프림과 하얀 설탕, 그리고 커피원두와 따끈한 물을 종이컵에 넣고 적당히 섞으니 따뜻한 밀크커피 한 잔이 완성된다. 적당히 녹아내린 것을 확인하고 마셔본다. 쭈욱 들이키자마자 느낀 사실 하나. 커피 맛이 오늘따라 유독 쓰다는 거였다. 물을 적게 탔나? 싶었지만 매번 타던 대로 탔으니 그것도 아니고. 그 입가에 남은 맛을 입에 담으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박쥐>의 어둠 속에 다시 133분 동안 취하고 나오니 전과는 다른 무언가의 느낌이 감지된다. 첫 번째로 봤을 때보다 내용이 혼란스럽지 않긴 했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상영 전 마셨던 밀크커피 맛이 생각났다. 설탕맛처럼 사람의 이목을 잡아 끌지만 정작 마시고 난 이후에는 쓰디쓴 맛이 들었던 그 몇 초, 아니 몇 분의 시간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이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영화 속 한 캐릭터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밑도 끝도 없이 건조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사랑받는(beloved) 지역에서 줄곧 벗어나 있던 태주(김옥빈 분)의 다크서클 어린 지친 얼굴 말이다.
"신부님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행복한복집 안에서 상현(송강호 분)과의 첫 합방이 성사되기 직전의 순간, 태주가 건조한 말투로 뇌까리는 말은 대략 이러했다. 그 풍경을 보노라니 목소리는 늘어지고,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상 이 호소를 받아 줘야 하는 사람은 상현이겠지만, 실제로는 상현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듣든 상관 없었을 것이다. 단 ('병신'이라는 과격한 말로 표현할 정도로 혐오하는) 자신의 남편 강우(신하균 분)와 라 여사(김해숙 분)은 제외하고.

문제는 왜 상현인가? 하는 것이다. 허나 그 답은 간단하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아닌 상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관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다. 흡사 영화 초반 상현에게 은총을 내려 달라며 따라다니는 광신도들의 얼굴을 닮은, 자기 태생의 갈증(Thirst), 즉 타는 목마름이 낳은 결과다. '누가 날 좀 살려 줘!' 라고 외치던 찰나 그 자리에 뱀파이어 상현이 끼어들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태주는 어릴 때부터 라 여사의 집에 얹혀 살았고, 성장한 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우의 부인이 되었으며 향후에도 라 여사와 강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강우의 뒷바라지(지극히 강우의 의지와 따라야 하는 '보온주머니에 따스한 물 새로 채우기' 같은 행위)를 해 주어야 하고, '오아시스' 일당과 마작을 하는 라 여사 대신 집안일(지극히 전형적이고 연속적인 형태를 띠는 '김밥 말기' 같은 행위)을 도맡아 한다. 태주 본인의 말대로라면 "난 평생 저 사람들 강아지처럼 살았던" 캐릭터.
물론 그 와중에도 개인의 욕망은 존재한다. 가령 자위하다 잠든 강우의 벌린 입 위에 쪽가위의 날을 끊임없이 넣었다 빼는 장면이나, 자신의 허벅지를 날카로운 흉기로 내리찍는 모습, 맨발로 마구 뛰는 모습 등이 그렇다. 다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다는 의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지로 머물 뿐이다. 자위는 비단 강우에게만 포함되는 일이 아니다. 그 모습을 무심한 듯 바라보던 태주 역시 (상현과 만나기 전까지는) 남다른 방식으로 자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눈 딱 감고 도망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환경 속에서 태주는 끊임없이 태주의 집이라는 주 공간에서 겉돈다. 이를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강우의 입원 장면에서 상현과 라 여사의 초점과 태주의 초점을 대비시키는 장면이다. 라 여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 모습에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태주는 카메라의 초점에서 벗어나 흐리게 보인다. 반면 태주에 초점이 맞춰지면 상현과 라 여사의 초점이 흐려진다. 이 모습이 두세번 정도 반복되는데 흡사 다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대단한 효과를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초점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낳는 이질감은 상상 이상이다. 이는 <박쥐>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자 끝없는 소용돌이 안에 빠져드는 이야기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장치들 중 하나다.
그러던 태주가 뱀파이어 성직자 상현을 만나 사랑에 눈을 뜨고, 동시에 욕망에 눈을 뜨며, 숨어 있던 모습을 일깨우기 시작하면서 <박쥐>는 미칠 듯한 소용돌이로 관객들을 끌고 끊임없이 빠져들어간다. 마구 늘어지던 목소리는 보다 강단이 섞인 목소리로, 지친 모습은 웃음으로 변한다. (자신을 안은 상현이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내려앉는 모습에서 보여지는 천진한 태주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영화 초반 바이러스가 창궐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바지라의 저주(소위 '과부의 저주')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내용대로 과부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닐 게다. 달리 생각하면, 태주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난 처녀나 다름 없어요.." 라고 내뱉는 태주의 모습만 해도 그렇다.
형식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겪었어야 할 유부녀이지만 차라리 처녀로 취급되는 게 더 어울리는 데서 오는, 즉 자기 욕망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불협화음이 끝끝내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낚시터에서 강우를 물 속에 빠트리는 장면에서부터 이 소용돌이는 극한으로 치닫고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사라지는, 즉 파멸로 관객들을 몰아간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 뒤 급속도로 두뇌를 지배하는 불안심리 (태주집 침대 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떠메고 누워 있는 강우의 모습이 보이는 환상 장면 같은) 와 발악, 정당화와 그로 인한 연쇄적인 결과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이 태주가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기 위해 가장해 왔던 몽유병의 일환일 수도 있다. 그 구조 자체가 매우 건조한데다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대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환상이 최소한 <박쥐>를 괴이한 작품으로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앞서 쓴 '상현의 시선으로 본 <박쥐>'에서 여러 에피소드가 해체와 결합을 반복하고 강한 이질감을 형성하면서 다른 꼴의 뱀파이어 세계를 구축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해체와 결합을 반복하는 에피소드' 란 이런 이질적인 분위기가 만드는 환상성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비린내와 각종 기괴한 효과음들,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와 웃음소리 등으로 표현되는, 가히 섬뜩한 모습들. 그 모습에 손을 뻗을 것인가 끝끝내 뿌리칠 것인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지만, 나는 작은 손이나마 뻗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자기 그늘을 숨기려 들지 말게나.' 그 발가벗겨진 치부의 세계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트렁크 안에 몸을 숨겨도 그 최종장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2009.05.06 / 진사야 / zinsayascope.com)
[박쥐] 관련 다른 글
박쥐 (Thirst, 2009) - 전체 단평
<박쥐> 속 상현의 시선 : 하느님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영화담론 / 긴 영화리뷰" 분류의 다른 글
| 이웃집 좀비 (The Neighbor Zombie, 2009) _ 오영두, 홍영근, 장윤정, 류훈 |
| 썸머와의 500일 ((500) Days of Summer, 2009) _마크 웹 |
| 페어 러브 (Fair Love, 2009) |
| 더 문 (Moon, 2009) |
| 2012 (2009) - 자네, 왜 뜨거운 돌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나? |


지속가능한 블로깅을 추구하는 진사야의 놀이터입니다. 부디 여기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peace :-)





상현때문에 뱀파이어가 되었지만, 상현보다 더 깊고 지독하게 물들어가는 태주.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든것은 상현이었지만, 뱀파이어 본능에 더욱 충실해지는 태주는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악과 쾌락에 빠져버린 이브와 겹쳐졌어요
여자가 빠지면 더 무섭다고.. ㅎㅎ
ㅎ 잘 읽고 저도 트랙백 걸어놓고 물러갑니다..
요즘 박쥐 영화평 숫자가 장난 아니네요
그만큼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반응이 쏟아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저번에 어딘가에서 적었는데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었죠. 계속 보다 보면 흡사 작년 [다크 나이트]나 재작년 [디 워] 이슈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런 걸 바라보는 재미도 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전 좀 더 다양한 이야기 (평의 개체수가 아닌 말 그대로 '다양한' 접근) 가 나왔으면 합니다만 그건 좀 무리겠죠^^;;
제가 좋아하는 류의 글이랑 비슷한 느낌이어서 말입니다.
좋은 휴일 보내세요~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