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에 대한 묘사가 있으니 아무것도 안 듣고 영화 보러 가실 분들은 가급적 피해가시길 바랍니다 :-D



박찬욱 감독의 따끈따끈한 신작 <박쥐>의 첫 장면. 고요한 피리 소리와 함께 병원에서 생사의 기로를 건너는 한 환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신부 상현 (송강호 분) 과 간호사 한 명이 지켜본다. 가쁘게 헐떡이던 환자가 상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리코더 좀 불어 줘요." 마치 투박하고 고요한 리코더 소리가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박쥐>의 시작은 이토록 종교적 구원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그것이다. 어쩌면 극 전개 동안 펼쳐지는 수많은 역회전들을 그것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이런 시작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로 처음과 끝의 강한 이질감이 구축하는 세계는 어둡고 어두운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토록 온갖 어둠으로 점철된 <박쥐>라는 공간 안에 선 상현은 신부, 아니 성직자(Priest)다. 직접적인 언급은 일언반구 없지만 주변인들에 의하면 '존경받는' 성직자다. 느닷없는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는 노신부 (박인환 분) 의 만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엠마누엘 신부 생화학 연구소로 찾아가 인체실험에 가담한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신앙 한 단어로 표현되는 캐릭터. 자발적으로 비활성 이브(EV)균을 인체에 투입하고, 온몸에 수포가 돋고 피를 쏟아도 오로지 신앙으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이브균 투여 전에 나오는 상현의 기도문을 상기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신성한 분위기.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이후에 펼쳐질, '흡혈귀(뱀파이어)' 로서의 상현이라는 또 다른 자아와의 충돌을 표현하려는 장치이리라. 양지의 상현이 신부로서의 상현 본연의 모습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음지의 상현(즉 뱀파이어로서의 상현)은 극중 대사("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처럼 본능적인 물욕(가령 태주와의 관계 등)을 좇아가는 모습이다. 성직자라는 이름 아래 꽁꽁 숨겨져 있던 욕구가 본격적으로 표출되는 순간, 명백히 대립되는 두 자아는 내내 이질적으로 결합하고 충돌한다.  극중 상현이 노신부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대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람의 피를 구한단 말입니까?"



<박쥐> 속 상현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크 프레베르의 '하느님 아버지'의 몇 구절이 떠오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그러면 저희도 땅 위에 남아 있으리이다.' (뱀파이어로의 이중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며 붕대 감은 상현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신자들 뒤에 우뚝 서 있는 십자가 속 천주의 모습은 변함 없이 그대로다. 그저 그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규범 위배(hamartia)이자 신성 모독의 현장을 말없이 지켜 볼 뿐. 이 모습은 상현에 대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먼 신세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신사의 고뇌와 겹쳐지면서 꽤 강력한 대비의 색채를 띤다.

어찌됐건 '직접 고르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피로 인해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었고, 뱀파이어라는 자아가 본래의 자아 내부에 끼어들면서 생겨난 욕구들은 지금껏 지탱해 온 성직자 상현의 이미지를 잠식하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러다 우리 지옥가요' 식으로 무마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다. 자아의 저 끝에서부터 갉아먹고 갉아먹혀 끝내는 본능적 움직임 외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상현은 (고통을 공유하는 관계의 태주와 함께) 서서히 지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소심하게 환자에게 주사를 찔러 넣고 관을 통해 누워 피를 받아먹던 상현의 모습이 자아의 혼란을 겪던 모습이라면, 지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한 상현은 한결 대담하다. 배우지 못했다는 마작도 즐겨 하고, 자기 욕구를 향해 온몸을 던진다. 심지어 라 여사(김해숙 분)의 눈이 쏘아보듯 쏟아지고 있는 그 강렬한 짧은 순간에도.

하지만 지나친 열기는 자기 자신마저 태우는 법이던가. 한 바퀴 이야기를 돌고 난 뒤 상현의 자아는 다시 한 번 충돌을 겪는다. 이번에는 성직자로서 가졌던 자아가 음지의 자아를 위협하려 든다. 하지만 이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는 현실이 괴롭다. 한 번 피로 물든 사제복은 정결해질 줄을 모르고, 그래서 태주의 집 한 구석을 온통 흰색으로 도배하지만 그 공간에서마저 기어이 욕구를 따라간다. 바깥으로 나와도, 모든 장막을 제거해 봐도 사정은 마찬가지. 되려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수치심만 배가될 따름이니 결국 어떻게 보면 미쳤다고 할 수 있는 목마름(Thirst, <박쥐>의 영문 제목)과 욕망의 갈구를 끝내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방법뿐이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해체와 결합을 반복하고, 강한 이질감을 형성하면서 <박쥐>는 같은 뱀파이어를 주제로 하는 영화인 <렛 미 인>과 다른 꼴의 뱀파이어 세계를 구축한다. 타의에 의해 뱀파이어의 세계로 인도되었고 ("수혈받은 피를 내가 고른 건 아니잖아요"라는 상현의 절절한 대사를 떠올려보자.) 그 세계에 취해 끝내 자기 자신에게까지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는 뱀파이어. 짧은 에피소드들을 한 곳에 정신없이 붙이는 것처럼 그 방법이 다소 불친절하게 와닿고 신경 쓰이는 점이 산더미 같지만 그래도 눈 앞에 펼쳐진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를 향해 작은 손을 뻗고 싶은 것은 아마도 상현을 통해 표현되는 뱀파이어의 이미지가 지나치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강하게 와닿기 때문이 아닐까. 흡사 넘어진 태주를 향해 순간적으로 손을 뻗는 상현의 모습처럼.
(2009.05.01 / 진사야 / zinsayasco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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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2 01:33 [Edit/Del] [Reply]
    일부러 사진만 봤어요... 극장에서 볼려구요..ㅎㅎ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데...험~~기대됩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5/02 02:15 [Edit/Del]
      Yasu님, ㅋㅋ 그거 사실 별 거 아니에요. 클로즈업도 아니었고 [아마 클로즈업이었음 더 난리 났으려나;;] 상징적인 의미가 상쇄하고 있어서 그런지 '야하다!'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듭니다. 하긴 그 정도의 노출은 이미 다른 영화들에서도 나온 전례가 있어서 요란스러워할 것까지도 없고요. 이미 <색,계> 같은 영화로 단디 데였을 터인디 뭘 그 정도 가지고....ㅎㅎㅎ;;
      하여튼 결론은 성기노출에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_= 영화평론가 듀나님의 글 중 인용하여, '딱 R등급 영화 수준의 그것'이거든요.
  2. 2009/05/02 08:08 [Edit/Del] [Reply]
    재미있을거 같은 영화네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5/02 13:06 [Edit/Del]
      블루팡오님, '재미있는' 범주에서는 벗어나는 영화입니다. 머리 제대로 쑤시기 딱인..ㅎㅎ
  3. 2009/05/03 00:33 [Edit/Del] [Reply]
    김옥빈 캐릭터는 별로 재미없으셨나봐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5/03 03:13 [Edit/Del]
      다이나모님, 설마 김옥빈양을 뺄 리가..ㅎㅎ 따로 적으려고 일단 이 글에서는 뺐습니다. 아마 다음주에 두번째로 관람하고서 올리게 될 것 같아요. 뭐랄까, 캐릭터의 시선별로 나누어 읽어 보고 싶어서 여기서는 일단 송강호가 맡은 상현 캐릭터 중심으로 갔어요. 이런 식으로 읽어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군요 ;-)
  4. 2009/05/04 12:05 [Edit/Del] [Reply]
    과연 프레베르의 시와 어울리네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5/04 19:12 [Edit/Del]
      에우리알레님, 예고편 보자마자 딱 저 시 생각이 나서 참 재미있었지요. ;-)
  5. 2009/05/04 20:05 [Edit/Del] [Reply]
    정말 다양한 부분을 곱씹어 보게 만드는 영화인거 같아요....
    영화를 본 시간보다 영화의 장면장면을 다시 생각해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만드는 영화인거 같습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5/05 15:42 [Edit/Del]
      라라윈님, 일종의 사유하는 재미랄까요. 어떻게 읽든 그것이 흥미롭게 다가오도록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해요. 그걸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말이죠. 모처럼 활발한 담론이 벌어지는 것 같아 내심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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