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유쾌한 연애담이 만드는 파르페의 맛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말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읊고 있다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 수많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뱃불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만인의 테마라고까지 불리고 있을까. 굳이 달라진 것을 꼽자면? 예전보다는 훨씬 그 모양새가 대담해졌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이런 대담함을 타고 남녀상열지사의 세계는 이 세상 모든 이를 현혹시킬 만한 열린 공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더 이상 '남녀'상열지사라고 못 박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인간 스스로 쌓은 제약이 만드는 장벽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자처하고야 만다.
이런 점을 따지고 보면,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속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상반된 캐릭터 비키 (레베카 홀 분) 와 크리스티나 (스칼렛 요한슨 분) 역시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다. 다만 미묘한 성향의 차이가 비키와크리스티나 사이의 간극을 만든다. 비키가 안정적인 연애를 선호하는 '조신형' 타입이라면 크리스티나는 어떤 사랑이든 불사를 자세가 되어 있는 '모험형 '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영화 속에 상반된 캐릭터를 구축해 놓았을까? 라고 크게 고민해야 할 필요는 없다. 성향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향하는 목적은 같은 지점, 즉 바르셀로나에 와서 얻은 인간적 욕망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바탕이 (남녀 제한을 가뿐히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것은 두말 할 가치가 없다.
각자 논문과 휴식을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에 온 비키와 크리스티나. 이 두 아가씨가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화가 후안 (하비에르 바르뎀 분) 을 만나 미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이건 분명 불장난의 시작이다. 크리스티나라면 문제 될 게 없으나 비키는 번듯한 약혼남이 있고, 후안은 전처 마리아 엘레나 (페넬로페 크루즈 분, 이하 마리아) 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이혼했다고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이기 때문에) 상태다. 여기에 중후반 실질적 불청객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가 끼어들며 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구 뒤엉킨다. 마치 이 모양새가 하나의 파르페를 연상시킨다. 아이스크림 위에 생크림, 생크림 위에 과일들, 과일들 위에 초콜릿 크림. 이 뒤엉키는 관계의 층 (혹은 명세서) 는 그야말로 끝이 없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쌓이는 것을 반복한다. 이렇게 층층이 쌓인 파르페는 깔끔하며 달콤하기까지 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본격적으로 눈앞의 사랑과 마주하는 자세가 바로 그것. 우선 비키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어떻게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후안을 피해 가 보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욕망에 눈을 뜨고, 이것은 약혼남 더그를 대하는 태도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이 간다. 굳이 전단지 속 캐릭터 소개를 빌어 표현하자면, 후안과의 관계가 비키를 '천상 여자'에서 '좀 쎈 여자'로 바꿔 놓은 셈이다. 물론 관계의 적정선은 비교적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욕망에 한 번 눈을 뜨니 쉽게 걷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크리스티나의 경우는 어떠할까? 초반에는 적극적인 공세를 후안에게 벌이지만 마리아의 등장을 시점으로 국면이 바뀐다. 후안-크리스티나-마리아라는 삼각 세계 속 미묘한 관계를 그럭저럭 이끌어 나가지만 결국 극중 크리스티나가 만든 12분짜리 단편의 제목과 같은 '사랑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와 같은 자세로 끝을 맺는다. 초중반 비키가 가진 위치를 후반에 크리스티나가 가져가고, 초중반 크리스티나가 가지고 있던 위치를 후반에 비키가 가져가는 모습이 성립한다. 시작은 서로 달랐지만 종국에 나타나는 그 열정의 비중은 피식 소리가 배어나올 정도로 같다. 열정 앞에서는 '쎈 여자'와 '천상 여자'를 가르는 모든 기준이 쓸모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시종일관 유쾌한 영화 속 틀에 집어넣어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틀 안에는 '완성될 수 없어 낭만적인 연애담' 이라는 제한선이 존재한다. 음탕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옛날 옛적 바르셀로나에서 우리가 어땠느냐 하면..' 유의 이야기로 끝날 수 있는 것이다.
즉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연애담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저 그런 연애담으로 흘러가는 것은 거부하고 있는 영화다. 만약 그저 그런 스타일대로 흘러갔다면 영화의 재미는 그만큼 반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변론의 시간은 그만큼 늘어난다. 대체 이 변론의 시간 안에 무엇을 끼워넣고 있을까. 그 안에는 바로 남녀상열지사의 가장 은밀한 구석에 발을 들이미는 군상들이 빚는 희극이 있다. 러닝타임 96분을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풍광과 연애담이 엮여 유쾌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종일관 이 유쾌함의 끈을 놓치는 법이 없고, 그로 인해 잔재미 요소는 곳곳에 넘쳐난다. 영화에 깔려 있는 불장난이라는 기본 축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유쾌함에 기인한다.

여기에 자신이 잃은 것 (즉 자기 자신의 진짜 연애의 감정) 을 쉽게 되찾지 못해 반항적인 자세를 표출하는 마리아 역을 맛깔나게 소화한 페넬로페 크루즈의 열연은 보너스. 후반 40분 동안 마리아가 잊을 만하면 내뱉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혼합된) 악다구니 속에는 '나도 진짜 사랑을 받고 싶단 말이야!' 라는 비명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 속 모 누리꾼의 단평처럼 단순한 악다구니쯤으로 마리아의 태도를 해석하는 건 매우 위험한 시도다. 영화를 제대로 본 관객이라면 이 비명을 똑똑히 들었으리라.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유쾌한 파르페 같은 영화다. 장담컨대 온 가슴을 열고 스크린 속 불경한(!) 연애담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면 이 파르페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자세가 된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 왁자하게 웃어제끼고 즐기라고 멍석 깔아 놓은 영화는 아니었을까? 만약 우디 앨런이 영화를 만들면서 목표로 한 것이 이것이었다면, 분명 그 목표는 성공하고도 남아 흐르고 있다. 문제작이기도 하지만 출중하기도 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는 바로 이런 영화다.
★★★★☆
글 | 진사야
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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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오면 함 볼려구합니다~
원제로 평한 부분이 참 가슴 따뜻하게 합니다^^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불경한 연애담?이라 구미가 당긴는데요..ㅎㅎ
별은 정확히 말하면 네개 반입니다.^^ 흰별이 별점 반개를 뜻하죠.
제 사이트에도 트랙백을 장착했습니다. 혼자서 뚝딱뚝딱 만들어서.. 예쁘지는 않습니다^^
트랙백 걸어넣고 물러갑니다~~
수입사의 작명센스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ㅠㅠ 그냥 속편하게 원제 그대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국내 상영제목을 무시하는 건 [인 브리주] 에 이어 올해만 두번째네요. 하아...
http://www.moviejoy.com/trackback/e_list.asp
원래는 제가 사용하려고 만든건데.. 영화 뷰페이지 들어가서 보는 것이 귀찮아서 말입니다. 제가 사용하면서도 편해서 그냥 정식 서비스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혹시 영화평 작성하신후 번거롭겠지만 트랙백 날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사랑에는 진짜 대중없는 게 맞다니까요. 비키를 보면서 피식피식. 그나저나 아쉬운 게 있다면, 비키도 한 번 '일'을 저질렀어야 했다는 거 하하하. 그게 너무너무 아쉬운 거 있죠. 용기를 더 냈었어야 했다구요. 흐흐. 아무튼 스칼렛 요한슨도 이번 역에 적격이라 보는 내내 즐거웠사옵니다. 남자 주인공은 처음에는 어우 느끼해... 이러다가 저도 결국에는 그 매력에 옴팡 빠져들더라는! :)
스칼렛 요한슨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이 아가씨가 이렇게 예뻤었나? 하고 내심 생각 중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