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보다 몸, 고뇌보다 강단 

<그림자 살인>의 도입부. 고요한 야산에 버려진 사체 한 구가 있다. 그 사체를 의학도 광수 (류덕환 분) 가 발견하고, 사체를 끌고 간다. 카메라는 가까이서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나무 위에서 그 풍경을 쏘아보듯 위에서 아래로, 바라볼 뿐이다. 이 사각의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움직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간 안에서 바깥으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격적인 이야기. 이 짧은 숏을 통해 <그림자 살인>은 그 스산한 분위기로 관객을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흡사 이렇게 속삭이면서. "이 모습을 본 순간, 넌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이게 영화의 본래 분위기가 아니라면?

바로 다음 장면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아주 약간의 미동을 경험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건 분명 우리가 품었던 첫 생각과 조금 다른 것이다. 다소 발랄한 느낌마저 드는 음악이 배경에 깔리며 본격적으로 영화가 의도한 본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마치 눈 앞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단도들처럼, <그림자 살인>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배경은 살벌한 일제강점기에,  떨어진 떡밥은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사람을 찾습니다' 에서 시작하는 살인사건의 진범 잡기. 여기에 진호가 끼어들고, 의대생 광수가 끼어들고, 발명가 순덕 (엄지원 분) 이 끼어든다. 이것이 <그림자 살인> 이 갖춘 기본 이야기의 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살인사건을 지나치게 Why so serious? 식으로 해결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문제는 이게 <그림자 살인> 내부에서는 극히 정상적인 순서라는 거다. 애초에 이건 '탐정추리극' 을 표방만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몸으로 부닥치는' 괴상한 탐정에 대한 이야기인 까닭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정통 탐정물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그림자 살인>은 탐정추리극이 아니다. 캐릭터 소개에서는 주축 인물 홍진호 (황정민 분) 를 두고 사설탐정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우리가 으레 생각하기 쉬운 '머리 쓰는' 탐정의 꼴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가 영화 속 첫 위치도 탐정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극 초반의 홍진호는 탐정이라기보다는 '찌라시 언론이 쓸 만한 떡밥을 제공하는 인물' 로 표현하는 게 훨씬 적당하다.



불륜 현장 잡기를 청탁받아 다니고, 결정적 순간을 찍어 당대의 찌라시 신문사에 팔아넘기는 인물. 누가 봐도 속물 기질이 다분하다. 여기에 광수의 요청으로 인해 어쩌다 탐정 역할을 자처하게 되는 캐릭터가 바로 홍진호 캐릭터의 실체. 이런 캐릭터의 특성이 러닝타임 내내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에 좀 머리를 쓰면서 노는 탐정물을 기대했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림자 살인>은 이 '머리를 쓰는 행위' 를 일부만 남기고 생략해 버린 후, 그 자리를 쌈박 스타일로 채워 넣는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탐정이라기보다는 형사에 가까운 캐릭터를 내세운 '추리 시대극' 이랄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앞서고, 고뇌보다 강단이 먼저 앞서는 모습이다. 실감적인 탐정물을 보여 주기보다는 문제 해결의 꼴을 갖추는 모습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그림자 살인>이 가는 길이다.

이런 모습이 영화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크게 해악을 끼칠 정도까지는 아니다. 단 여기에는 절대적 전제가 하나 따른다. 탐정추리극 치고 좀 괴상한 스타일을 극복할 것. '탐정 추리극' 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매이지 마시라. 이 전제만 뛰어넘으면 충분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한다. 극중 유머 (특히 오달수가 맡은 순사부장 오영달 캐릭터에 주목해 보시라. 사람에 따라서는 현실과의 묘한 데자뷰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도 꽤 유효한 편이고, 서커스가 벌어지는 장소와 서커스 장면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함을 갖추었다. 또한 단발적 이슈에 편승하는 '찌라시' 언론의 은유를 담뿍 담아 내놓는 신문사 장면은 그 자체로 실소를 자아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 살인>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보다 지적인 탐정물에만 올인하는 것 대신 여기에 오락적인 요소를 끼워넣다 보니 의도한 본래의 매력이 퇴색되기도 한다. 가령 앞에서 이야기했던 서커스 장면의 경우. 조사를 하기 위해 온 진호와 광수가 눈앞에 펼쳐지는 서커스 장면에 열광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너무 이 과정이 오락적인 시선 중심으로 흘러가다 보니 사건을 해결하는 캐릭터로서의 홍진호가 가진 매력이 깎이고 만다. 홍진호 본연의 모습을 보다 잘 보여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 구석이다.



괄목한 수준의 만듦새는 아니지만 시대극으로 본다면, 그리고 (추리물이라는) 한 테마의 첫 단추로 생각한다면 이 결과물은 마냥 부적절하지는 않다. 여기에 더 나은 국산 탐정추리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위한 데이터가 될 수 있다면 <그림자 살인>의 가치는 향후에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게다. 지금보다는 이후가 더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표적 사례. 좋은 영화는 기존에 나왔던 영화들이 꾸준한 시행착오를 거쳐 데이터를 구축하는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굴려먹느냐는 전적으로 그 다음 도전자의 몫에 달렸다.

★★★☆


글 | 진사야
200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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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3 20:21 [Edit/Del] [Reply]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ㅎㅎ 예고편만 봐도 홍진호라는 캐릭터가 머리를 쓰는 캐릭터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역시나 이런 캐릭터였군요. 평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지만, 기대만 안하면 재미는 있다는 평들을 좀 봤는데 맞나요? 배역 이름을 잘못정해서 고생을 좀 했는데 그래도 성과가 좀 있었으면 좋겠네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3 22:55 [Edit/Del]
      철이님, 너무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편하겠습니다. 충분히 재미는 있습니다만.. 탐정추리극이라고 해서 진짜 탐정물을 기대하셨다간 낭패 보실 겁니다 ^^
  2. 2009/04/04 10:11 [Edit/Del] [Reply]
    트랙백 받고 왔습니다.
    그럭저럭 재밌기는 했지만 많이 아쉬웠습니다.
    영화가 잘 되면 속편도 나올 수 있다고 하던데 속편은 좀 힘들겠죠?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12:18 [Edit/Del]
      초매다루님, 속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만에 하나 나온다면 보고 싶습니다만.. 본편의 성적에 따라 좌우되겠죠. 제 생각으로는 순덕의 에피소드를 따로 꾸려 봐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 )
  3. 2009/04/04 10:23 [Edit/Del] [Reply]
    저는 이 영화가 보여준 오락적 측면의 재미에 꽤나 만족한 편입니다. 미스터리나 스릴러로서의 완성도와 재미는 떨어지지만, 가볍게 웃고 즐길만한 수준의 재미가 있죠. 아무래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홍진호역의 황정민 덕이겠지만. 헐리우드 버디 무비나 시리즈 물들이 국내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에서 등장한 작품이라 더욱 반가웠는지도 모르지요. 한국 영화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는 듯 해서 즐겁습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12:25 [Edit/Del]
      다크비존님, 영화 자체는 꽤 재미있었지요. 다만 진짜 미스터리나 추리극을 연상했다면 그저 묵념... 뭐랄까 특유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려는 게 눈에 보였어요. 저도 이 영화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런 작품들 보면 재미있죠. 후속타로 어떤 작품이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그만큼의 흥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긴 합니다만;;
  4. 2009/04/04 14:26 [Edit/Del] [Reply]
    ^^ 트랙백 보구 방문 왔어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16:09 [Edit/Del]
      슈밀크님, 반갑습니다 :-) 영화 이야기도 해 주시지 ㅎㅎㅎ 그래도 환영합니다~ 영화 블로그를 하시는군요. 종종 놀러 가겠습니다 ㅋㅋ
  5. 2009/04/04 17:01 [Edit/Del] [Reply]
    트랙백 받구 답방왔습니다~
    아쉬운 점이 많았던, 다만 후편이 무지 기대되는 영화였죠.
    어딘가 모르게 여성스러운 느낌의 영화라 광고 포인트를 조금 다르게 잡았어도 좋았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21:08 [Edit/Del]
      구름비님, 진짜 후편 나올지 기대해봐야겠습니다. 만에 하나 나온다면 순덕 캐릭터를 살려서 만들어 달라! 부르짖는 1인입니다. ^^
      음, 여성스러운 느낌의 영화라.. 어떻게 보셨기에 여성스러운 느낌이라고까지 칭하셨을까요? 쓰신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ㅎㅎ
  6. 2009/04/04 18:59 [Edit/Del] [Reply]
    그림자살인.
    보고싶은데 시간을 맞추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시간 내서 봐야겠는걸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21:09 [Edit/Del]
      초코송이님, 오락용으로는 충분히 볼만한 영화입니다. 시간 꼭 내셔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
  7. 2009/04/04 21:24 [Edit/Del] [Reply]
    이거랑 실종이 요즘 좀 땡기긴 한데 말입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4 21:32 [Edit/Del]
      Fallen Angel님, [실종]을 못 봤기 때문에 이 영화는 설명을 해 드릴 수 없는 게 애석하군요 ㅠ.ㅠ 스릴러보다는 리얼을 중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말이죠. ^^;; [그림자살인]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추리극이라는 데 너무 매여 보지만 않으면요.
  8. 2009/04/04 23:18 [Edit/Del] [Reply]
    담주에 이 영화 볼 예정이라, 리뷰를 슈우웅~ 건너 뛰었습니다. ㅎㅎ 예고편만 봐서는 그리 땡기지는 않았는데, 다들 좋다고 하고, 울 나라 영화라 봐줄 생각입니다. ^^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5 12:46 [Edit/Del]
      만물의영장타조님, 추리극이라는 것에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면 비교적 볼만하더군요. 보시고 어떠셨는지 꼭 알려 주시길 :D
    • 2009/04/08 08:20 [Edit/Del]
      어제 그림자 살인 보고 왔습니다.
      기대를 워낙 안했서인지는 몰라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ㅎㅎ 추리극에 코믹적 요소도 더해져 심심치 않게 봤습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8 14:17 [Edit/Del]
      만물의영장타조님, 오락적으로는 꽤 잘 짜 놨더군요. 정직한 추리물로 만들었다면 또 어땠을까 궁금증이 남긴 합니다만 그래도 뭐 재미있었으니 만족이구요 ^^
  9. 2009/04/06 19:12 [Edit/Del] [Reply]
    미묘합니다. 재밌게보긴했는데 약간 허전하고...허전한데 뭔가 본 느낌은 나고.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6 19:22 [Edit/Del]
      다이나모님, 뭔가 허전한 느낌이라. 저도 그 생각 했습니다. 분명 재미있는 영화였는데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느낌이 계속 머리에 남는.. 미묘하죠.
  10. 2009/04/07 19:43 [Edit/Del] [Reply]
    저는 사실 영화 제대로 못 만들고서는 '나머지는 다음에 보여주마!'라고 마무리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어요. 물론 영화 자체는 꽤 재밌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래도 영화 속 오달수 캐릭터는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아요ㅋ (하지만 후속작이 나온다면 오달수는 흑ㅠㅠㅠ)
    • OpenID Logo 진사야
      2009/04/07 20:09 [Edit/Del]
      인생의별님, 오달수는 그야말로 얼굴에 조커풍 미소를 긋게 하더군요. 낄낄낄. 덕분에 즐거웠달까요.
      그림자살인에 대해 악평을 쓰신 분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시는 게 인생의별님이 말씀하신 그런 부분이더군요. 후편 관련... 아무리 생각해도 추리물로의 매력은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신 오락성이 꽤 많이 들어가서 관객들에게 재미는 충실히 주긴 합니다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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