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이 아직도 하찮게 보이시나요?
<라따뚜이>와 <월-E>를 통해 바라보는 표면적 아웃사이더의 총천연색 보고서 _ TEXT. 진사야
(주의 : <라따뚜이>와 <월-E>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픽사 스튜디오의 여덟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라따뚜이>(Ratatouille, 2007)는 여러 가지 면에서 관객들을 시험대에 올려놓을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 몇 가지로 압축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 중의 하나인 쥐라는 점이 첫째, 그 쥐를 주인공으로 한 요리를 소재로 삼은 영화라는 점이 둘째다. 이른바 ‘주방 퇴치 대상 1호‘ 라는 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한단다. 아무리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와 같은 오픈 마인드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도 이 기괴한 영화 속 설정 앞에서는 질겁할 수 있는 배경 설정이다. 아무리 그것이 영화 속 설정에 한정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위생적인 측면에서 느낄 수 있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쥐(Rat)가 스크린 - 혹은 화면 - 을 휘젓고 다니는(touille) 애니메이션에 매료될 수 있는 - 아니, 말을 바꾸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이유는 바로 영화 전면에 흐르는 이야기로 구성된 직소퍼즐의 판과 그 위를 채우는 설득의 힘이 큰 역할을 한다. 이야기 속 설정을 이해하는 데 유일하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영화 초반부 요리주방장 구스토의 인용구(Quote) 중 하나인 ‘누구나 요리할 수 있습니다(Anyone can cook)' 라는 말은 관객들의 경계심을 무장해제 시키는 -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그것은 취향의 차이가 될 테니 어쩔 수가 없지만 - 어떤 장치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며, 이후 어떤 상황이 들이닥쳐도 그 상황을 설득시킬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자체 내장‘ 하고 있다. 결국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 자체의 상황을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의 오픈 마인드 여부를 시험하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긴 하지만, 굳이 초반부부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후반부, 음식평론가 안톤 이고가 생각을 바꾸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영화 속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 레미. 이 친구는 일단 좀 특별한 생쥐다. 생쥐인 주제에 ‘손에 더러운 거 묻히기 싫어요!’ 라고 부르짖으며 - 마치 디즈니의 고전 명작 <미키 마우스>의 그것처럼 - 두 발로 걸어 다니기 일쑤고, 요리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며 그 능력으로 동료 생쥐들의 안전 (쥐약 등의 인간으로부터 오는 위협) 을 챙겨 오는 일을 한 친구다. 하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이 레미의 활력소가 될 리는 없을 터. 레미가 바라는 것이자 1차 목표는 소위 요리의 주변인이 아닌 요리를 직접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레미의 운명 중 하나였던 수동(passiveness)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능동(activeness)의 터로 나아가는 과정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쳐 가는 행동의 계기가 되는 요소가 바로 구스토가 쓴 서적 [누구나 요리할 수 있습니다] 와 레미의 심경을 대변하는 구스토의 영혼이다. 결국 <라따뚜이>는 아웃사이더의 반란을 위한 하나의 찬사와 격려를 섞어 버무려 놓은 마법으로 정의할 수 있는 영화다. 레미를 - 쥐라는 기본 설정을 배제한 측면에서 - 하나의 아웃사이더로 규정하고, 구스토를 그 아웃사이더를 독려하는 하나의 인물로 규정함으로서 마법이 설득력을 얻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그 뒤를 이은 픽사의 아홉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월-E> (WALL-E, 2008)가 바로 그 작품이다. <라따뚜이> 속 레미와 <월-E> 속 주인공 월-E는 이른바 소외된 아웃사이더를 대변하는, 두 영화의 공유된 메시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다. 레미는 쥐라는 생물학적 특징이 그 요인이 되고, 월-E는 지구상에 혼자 남겨진 유일한 로봇이라는 영화 속 설정이 그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 레미와 월-E로 대변되는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하찮은 존재들
<월-E>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로봇들이 혼재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통해 디스토피아 세계의 어딘가를 강력하게 비추어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 오토를 제외하고 - 월-E와 이브를 포함한 모든 로봇들은 하나같이 주어진 기계적 일상에만 치중하는 캐릭터들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 하다가 수명이 다하거나 불량임이 판명나면 폐기처분되어 어딘가에 버려지거나 사형선고를 기다려야 하는 형편에 놓여 있다. 즉 인간들의 또 다른 세계인 엑시엄 세계를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하는 오토를 제외하면 나머지 로봇들은 상당히 수동적인 체계를 조금씩 갖추고 있는 소위 ‘하찮은’ 캐릭터들이다. 인간들이 황폐해진 지구를 떠난 이후 홀로 남겨진 월-E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즉, 지구의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 을 하며 살아가는 로봇이고, 이브는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요구에 의해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온 로봇이다. 모(M-O)는 어떨까? 역시 인간들의 요구에 의해 엑시엄 세계로 들어온 독성 물질을 제거해야 하는 역할이 자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로봇의 하나일 뿐이라는 설정이 캐릭터를 뒷받침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로봇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소위 어떤 목적이나 요소 앞에 그저 던져졌을 뿐인 캐릭터들의 집합. 딱 봐도 <라따뚜이>의 레미가 처한 그 환경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 환경을 감싸는 외피 - 즉, 배경을 의미한다. - 만 다를 뿐 그 공간을 구성하는 아웃사이더들의 그것은 결국 같은 질량을 갖추고 있다. 두 작품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런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두 상반된 단어가 만드는 기묘한 결합으로 수렴되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데 역할을 하난 어떤 연료로 화학 작용하는 특징을 지닌다.
<라따뚜이> 속에 등장하는 쥐들은 자신들의 자체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커뮤니티(Community)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운명을 -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 타고날 수밖에 없는 생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커뮤니티와 인간 세계의 그것과는 합일될 수 없는 틈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영역을 침범하게 될 경우 가차 없이 위험에 내몰린다. 극 중 레미의 아버지가 레미와 함께 간 어느 상점에 끔찍하게 걸려 있는 쥐덫과 그 쥐덫에 걸린 쥐들의 모습은 흡사 다른 세계를 침범했을 경우에 처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간접적인 영향은 미쳤을지언정 쥐들이 알아서 만든 규정은 아니다. 온갖 변혁을 겪으며 삶의 질을 구축해 오기 시작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어떤 규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라따뚜이> 속 레미를 포함한 쥐들이 처한 환경은 인간이 규정해 놓은 생물학이라는 어떤 학문으로 구성된 환경이 만든 산물이다. 반면 <월-E> 속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처한 환경은 인간의 프로그래밍 기술이 만들어 놓은 환경의 산물이다. 인간들은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해 자신들의 두뇌를 이용하여 어떤 무형을 유형으로 만드는 기술을 체득하기 시작했고, 이런 연구들로 하여금 생겨난 것이 바로 어떤 프로그래밍 기술들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보다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데 쓰기 시작하면서 생활의 질을 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긴 부작용 - 예를 들면 각박함과 망각의 위험, 인간의 기계화 등 - 들도 적지 않다. <월-E> 속 로봇 캐릭터들은 바로 이런 부작용들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하나의 집합체다.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이 정확하게 들어 있고 오로지 그 일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로봇들의 운명은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그 자체의 기본 모습이기도 하지만 문명 앞에 기계화된 인간들의 모습을 실체화시키는 강력한 도구이자 매개체로도 작용한다.
상상과 현실의 대비를 통한 인간의 선입관을 향한 조롱
‘때로는 머릿속 상식이 최고의 착각을 유발하는 요소다.’ EBS <지식e 채널> 을 빌어 나간 이 짧은 문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처럼 인간은 어떤 두뇌 속 선입관에 의해 지배당하는 생물이다. 개인 혹은 단체의 경험이나 세뇌 등을 통해 길들어진 어떤 선입관들은 어떤 것의 첫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을 함으로써 보다 넓은 생각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하는 역효과 또한 갖고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다. <라따뚜이>의 후반부, 링귀니의 출중한 요리 실력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 꼴레뜨를 제외한 - 구스토의 식당 요리사들은 하나둘 음식점을 떠나기 시작한다. 음식 평론가들을 다시금 구스토의 식당에 주목하게 만든 요리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한 자가 인간이 아닌 생쥐라는 원초적인 사실로 인해서다. 이는 인간의 선입관이 그 바로 앞에 생겨난 변화와 어떻게 충돌을 빚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동시에, 어떤 상상과 현실 사이의 충돌까지 대변한다. 영화 속 설정을 대입해서 어떤 음식을 만든 자가 생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과 모르고 있는 상황을 놓고 생각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 상황 자체가 선뜻 상상하기 힘든 사실이다 보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큰 충격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마주쳤을 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충격이 오게 될 것이다. 마치 개고기로 대표되는 보신탕을 앞에 놓고 이것이 개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먹을 때와 모르고 먹을 때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짧은 장면을 통해 <라따뚜이>는 상상 안쪽의 영역과 상상 바깥쪽 영역의 충돌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했던 인용구는 바로 이렇게도 변용이 가능할 것이다. ‘때로는 머릿속 상상(혹은 선입관)이 최고의 착각을 유발한다.’ 라고.
이런 생각과 실제 상황의 충돌은 후작인 <월-E>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엑시엄 호를 타고 우주로 피신한 인간들은 그 세계가 안겨 주는 세상에서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생활을 한다. 엑시엄 호 속 인간들은 하나같이 몸이 불어 있으며 기계가 없으면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하며, 정작 자신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지구라는 세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 마치 사방이 꽉 막힌 듯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정보가 통하지 않는 환경에 놓여 있어서다. 선장이 따로 있긴 하지만 이 선장은 이 아이러니한 이야기 속에서 - 후반부를 제외하면 -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이런 무력화된 인간들을 조종하는 오토라는 로봇이 있다. 이 로봇 오토는 현대 사회의 빅 브라더에 대한 은유적 매개체이며 디스토피아의 실체를 지칭하는 대표적 캐릭터다. 이런 요소들로 사방이 꽉 채워져 있어 인간들은 지구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잊은 채 엑시엄 호의 부속품쯤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극단적 정보망 소통 불가의 상황을 통해 <월-E>는 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 인간들을 역으로 지배하는 모습과, 지구라는 공간에 동화되어 남들과 다른 인격을 지니게 된 또 다른 로봇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 줌으로서 주변에 둘러싸인 채 휘둘리는 인간의 편협한 사고를 조롱함과 동시에 인간 본연의 선입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 간에는 ‘선입관’ 이라는 명사와 ‘조롱’ 이라는 동사적 단어를 결합해 만든 어떤 접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접점과 접점 사이의 틈은 매우 서서히 좁혀든다는 특징이 있다. 우선적으로 <라따뚜이>를 처음 접했을 때 품기 쉬운 쥐라는 생물이 주는 선입관과 <월-E>의 시놉시스를 봤을 때 품기 쉬운 로봇이라는 인위적 매개체가 주는 선입관을 관객들에게 질문한 뒤, 그 실체를 관객들의 눈을 거쳐 본격적으로 펼쳐 보임으로써 인간이 으레 가지기 쉬운 선입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마치 붉은 커튼 안에 감춰진 우리의 치부를 거침없이 들춰내듯이 말이다. 극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베이스 안에서 이런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향후에도 의미 있는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혁명의 힘
< 월-E>의 후반부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수많은 불량 로봇들과 월-E와 이브, 모 일행과 함께 엑시엄 호 안을 휘젓고 다니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형선고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처한 거나 다를 바 없는 불량 로봇들이 월-E를 따라 내달리는 장면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선물한다. 그 메시지란 소위 아웃사이더들이 펼치는 ’혁명의 힘’ 에 있다. 월-E의 영향을 통해 불량 로봇들은 그저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삶이 아닌, 자신들도 무언가를 즐기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즉 같은 로봇을 통해 수동적 개념의 그것에서 능동적 개념의 그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세계에는 이른바 오토의 반란 - 내지 변절과 역습 -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웃사이더로 대변되는 평범한 로봇들의 폭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 어떤 모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계어로 소통하는 방법도 택하지 않았다. 그 열쇠는 바로 그들 간에 통하는 어떤 감성적인 장치에 있다. 지구라는 공간으로 인해 동화된 로봇과, 그 로봇에 동화된 다른 로봇들의 세계, 그리고 이 로봇들의 세계가 최종적으로 기계화된 인간들마저 감화시키기까지. 이것은 감성과 소통에 대한 상당히 묵직한 메시지를 담아 마치 도미노가 하나씩 줄지어 쓰러지다 최종적으로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처럼, 우리들 앞에 돌아온다.
<월-E>가 혁명적인 느낌을 직접적으로 선물했다면 <라따뚜이>는 보다 유연한 방법의 혁명을 택했다. 후반부 안톤 이고가 구스토 레스토랑을 다시 찾아 음식 비평을 하는 장면에서 링귀니(와 레미) 는 가장 서민적인 음식 중 하나인 라따뚜이 요리를 내놓는다. 음식 비평가에게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닌 가장 서민적 음식을 내놓다니,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큰 효과로 이내 돌아온다. 만약 내놓을 수 있는 고급적인 음식을 내놨다면, <라따뚜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절반 정도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 링귀니와 레미, 꼴레뜨의 합작품은 단순히 음식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관객들에게 ‘처음 들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갈 것’ 을 주문한다. 그리고 이것은 라따뚜이 시식 후 안톤 이고의 느낌을 이미지화한 플래시백 장면으로 결론지어진다. 마치 어머니가 직접 해 준 처음 그 맛처럼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 느낌으로 돌아가야 함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몇 분간의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바로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라따뚜이>의 결말에서 결국 구스토 레스토랑은 위생적 문제로 문을 닫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절망적인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을 끝내 거부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될 테고, 그 시작에는 그것을 증명해 줄 만한 뒷받침을 해 주는 증거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뒷받침되는 증거들은 모두 이 작은 생명체들이 이룩한 혁명의 실체다.
두 작품 간에 묘한 차이가 있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본질은 같다. 이야기의 주체는 우리가 흔히 하찮게 느낄 수도 있는 것들이라는 점과 그 자체로 인간의 선입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는 점, 그리고 그 중심에는 혁명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것은 - 과격하다는 조건을 배제한다는 전제가 깔리기는 하지만 -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을 동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꽤 매혹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동화의 대상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 생쥐들과 로봇은 영화 속 모습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들, 우리가 이래도 괴상하거나 하찮게 보이시나요?’ 라고. 개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단연코 ‘아니.’ 라고 할 게다. 그것이 설령 두 시간짜리 영상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꿈과 같은 감흥이라 할지라도, ‘이 하찮은 생물들’ 이 전달하는 따뜻한 온기의 선물을 거절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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