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뜻 손 내밀고 싶은 그 쾌청한 낙원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이엘리와 오스칼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이엘리는 문을 비집고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 하나, 이엘리가 온전히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오스칼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이엘리에게는 댓가가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엘리의 피부 속 온갖 신경을 통로 삼아 온 얼굴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오스칼은 선뜻 바로 내뱉지 못했던 외마디를 쏟아낸다. "들여보내줄게!!"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세계를 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순간. 그 작은 몇 마디로 이루어진 의식을 통해 두 영혼은 서로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한 공간 안에 발을 담근다.
<렛 미 인> 속을 지배하는 세계를 소위 '들여보내 주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상징할 수 있다면,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 속 주요 배경인 뉴욕(New York)이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문은 누구나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구닥다리 문이요, 저 너머 붉은 빛 세계로 통하는 구멍이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가면 왁자한 숏버스의 전경이 환영하듯 우리 앞에 다가온다. 숏버스의 마담의 말을 인용하면 이 사소한 언더그라운드 살롱의 취지는 '재능이 있지만 어딘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대입하여) 하자가 있는 이들' 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기 위한 공간. 그리고 그 살롱은 성 정체성에 상관 없이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악기들의 선율과 노래를 듣기도 하고 절로 웃음을 유발하는 영상을 보기도 하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바라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폭탄 대신 성교를!' 공간으로 대변되는 그 물결에) 주저 없이 뒤엉킨다.

이런 모든 행동들이 성립하는 순간 숏버스 속 세계는 흡사 쾌청한 낙원이 된다. 시설이 좀 부족해도 엄연히 위로받을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안에는 거리낌없이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게이이든 레즈비언이든, 양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이성애자이든 간에 상관없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떠나 그들은 자신에게 맞는 '회로 (즉,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난 색소결핍증이야!" 라며 고민의 무게에 짓눌리는 천사들에게 골고루 신선한 에너지를 뿌린다. 여러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숏버스라는 공간은 이토록 쾌청해 되려 눈에 담은 모든 풍경에 눈물을 절로 찔끔 쏟을 정도다. 섹스와 소통을 논하는 영화가 이토록 쾌청해도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이건, 서로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껴안는, 프리 허그(Free hug) 를 닮은 영화야.
엄밀히 말하면 <숏버스>는 섹스에서 소통과 치유로 바로 전개되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이 두 단어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 중요한 소재가 되지만 - 특히 소피아 (숙인 리 분)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고 해서 섹스와 소통을 바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다. 결정적으로 이 중간 단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련의 '동질감' 이다. 앞에서 숏버스 마담이 소개하는 대사를 인용해 숏버스는 '재능이 있지만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이들을 위한 공간' 이라고 하였는데, 숏버스라는 소우주에 모이는 사람들은 공통적인 특성을 갖는다. 분명 어딘가 마음이 허한 상태. 좀더 상세하게 이야기해 보면 외롭거나, 파괴적 자신의 모습에 지쳤거나 (세버린), 연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거나 (제임스 & 제이미) 생물학적으로 뭔가 난감한 일을 겪고 있는 등 (소피아 & 롭). 그 상태의 디테일이 다르긴 하지만 그 고민들이 뱉어내는 결론은 엄연히 같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숏버스>는 어딘가 심리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한 곳에 우르르 몰아 놓고 거기서 동질감을 뽑아낸 뒤 그 동질감을 한 데 그러모아 몽땅 우물 안으로 쏟아내 버린 후, 거기에서 소통을 길어내고 치유의 레시피를 길어낸다. 극 초반 소피아의 상담 방식인 '다른 사람 내보내고 한 명씩 상담하기' 와 대조되는 집단 최면의 현장이 바로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 '폭탄 대신 성교를' 공간 속 난교 장면으로 대변되는 섹스라는 테마, 즉 지금껏 이 영화의 논란을 만들어 온 이 두 음절의 단어는 이런 동질감 -> 치유 과정을 위한 하나의 기본 장치로서의 존재, 그뿐이다. 그들 마음에 내재된 솔직함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가 흔히 금기시하여 왔던 비밀의 세계를 끄집어낸 것이다. 솔직함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 속 "그건 안 돼!" 라는 메아리를 과감히 내치고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가 되었을 때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숏버스>를 단순히 섹스를 통한 소통 영화로만 규정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마지막 숨이 시작되면 악마와도 친구가 된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결국 오게 되는 법이고 (<숏버스> 오리지널 스코어 중 'In the End' 속 가사). 마음 속 '마지막 숨' 이 시작되어 갑갑할 때, 우리는 그 갑갑함을 타개할 어떤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에게나 오는 '순간'이다. <숏버스>의 첫 장면은 자유의 여신상을 거쳐 수많은 불이 장식하는 뉴욕의 모습을 흡사 애니메이션처럼 보여 주는 장면이고, 마지막장면은 동시에 꺼졌던 뉴욕 시내 수많은 불들이 다시 도미노처럼 켜지는 모습이다. 영화 속 인간군상들이 내뱉는 '마지막 숨' 의 시발점으로 첫 마디을 떼었다면, 그 '마지막 숨' 을 거두는 순간에서는 수많은 숲덤불을 지나 마침내 자신이 필요로 했던 편안한 공간에 안착하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마음 속 무거움을 벗는 순간이요, 미소짓는 순간이다.

<숏버스>의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는 순간, 그 순간의 모습들이 빚어 낸 잔영들이 무서우리만치 눈 앞에 회오리쳤다. 어쩌면 영화를 빌미로 나도 그 공간에 내 마음을 의탁하고 싶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그 공간을 보내야 함이 안타까웠다. 당장에라도 저 앞에 꼿꼿이 서 있는 하얀 스크린을 잡아 채 찢고 그 너머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공간이 엄연히 가상의 공간이기에, 이런 잔영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쉴 수 있다. 오로지 그 가상의 공간에 몸을 내맡기고 매혹적인 집단최면에 빠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게다. 그 공간 속에 발을 담그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101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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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진사야
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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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이 영화는 분명 위로가 테마입니다. 어쩌면 벗는 것보다 이걸 중요하게 삼았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던 기분을 이해받은 느낌" 이거 아주 적절하네요 ^^
아하하; 그저 영화 보고서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을 뿐입니다. 전 오히려 별님 글 보면서 많은 걸 느꼈는걸요 : )
오늘아침엔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네요...주말엔 날씨가 좋아지겠죠..^^
여기는 아직 비가 안 오네요. 비가 오면 날씨가 좀 차분해지려나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할애하고 있죠. 섣부른 낙관이나 판타지로 결말을 맺지도 않고요. 마지막 In The End는
그 온갖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앞으로 나아가리라 하는 생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 영화를 단순한 섹스영화로 보면 오산이다' 인 것 같아요. 무작정 이 쪽으로 생각하고 선정적으로 기사 작성한 언론들 다 한 대씩 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_-+
정말 그토록,'눈물' 나던 '축제'의 장면은...없었던 거 같아요.
인생에 그런 순간들이..얼마나 올진 잘 모르지만, 그때도 아마...눈물이 날테죠.. 글 잘봤습니다.
확인이 조금 늦었습니다만.
본 사람들 평이 극과 극이어서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잘 보셨다니 저도 보고 싶어지네요.
2007년인가 숏버스를 보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멋진 평을 쓸 수 있다니요.
헤드윅에도 출연했던 숙인 리가 등장해서 반가웠던 기억도 나고...
종종 들를께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헤드윅을 봐야 하나요. 보면서 저 언니(소피아 역의 숙인 리)멋지단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죠 ㅎㅎㅎ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