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재난 블록버스터 <블레임 : 인류멸망 2011>의 한 장면. ⓒ TBS

이런 가정을 해 보자. 한 외국영화가 국내에 수입이 되었다. 수입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내용도 꽤 괜찮고 극장에 거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 한 가지, 러닝타임이 조금 길다 싶다. 수입사는 하나의 꼼수를 부리려 든다. 이걸 몇 장면 잘라서 2시간 이내로 줄여 보여 주는 건 어떨까? 그래서 일부 장면을 임의로 편집한 다음 개봉을 했다. 근데 문제가 발생했다. 삭제된 장면으로 인해 영화의 개연성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고, 이것으로 그 영화는 그 나라에서 비평적 몰매를 맞고 말았으며, 이것은 수익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화의 제작사가 해외에서 그 영화가 무단으로 삭제개봉 되었다는 소식을 알고는 분개한다. 그 다음 상황은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근데 이런 아찔한 일이 저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바로 최근에,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정말 여러 사람 식겁하게 만들기 딱인 일이 아닐까.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 바로 몇 시간 전 언론을 타고 사람들 앞에 당도했으며, 그 주인공은 지금 이 시각에도 비평적 뭇매를 배 터지도록 맞고 있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재난 블록버스터 <블레임 : 인류멸망 2011> (이하 ‘블레임’). 대체 그 붉은 커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일본 영화 '블레임:인류멸망2011'(이하 블레임)의 한국 수입사 KTH가 일본 제작사의 허락 없이 이 영화를 20여분 잘라서 개봉한 것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KTH는 이 영화의 결말까지 마음대로 바꿨다가 일본 측의 공식 항의를 받고 나서야 다시 원편대로 바꾸는 촌극을 벌였다. 5일 영화계에 따르면 KTH는 '블레임'을 138분 분량의 원편에서 21분 가량을 잘라내 117분 분량으로 다시 편집한 뒤 지난달 26일 개봉했다... (중략)”
- 연합뉴스 김병규 기자,「日영화 '블레임' 수입사가 무단삭제 망신」기사 중에서

기사 내용을 더듬어 보면 <블레임>의 일본 제작사 TBS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멋대로 20분 정도를 편집해 상영했다는 소리인데, 기사 내용대로라면 수입사 KTH는 제작사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격이 된다. 한 영화를 왜곡하여 보여 주고 있다는 것. 이것은 단순한 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닌 해당 영화에 대한 ’예절‘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멀리서 볼 것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멀쩡히 제작된 영화를 제작사나 연관된 곳의 승인이 떨어진 것 없이 임의로 손을 대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는 일이던가. 이 의문의 대답은 아래 자료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중략) 크다면 크고 작다 해도 크다고 우길 만한 이런 실수는 누가 저질렀느냐, 정말 한국에서 모종의 재처리를 자행한 건 아니냐, 라고 물었더니 홍보 담당자가 펄쩍 뛴다. “광고 하나 만들 때도 본사가 일일이 간섭하는 마당에 재편집이라뇨!” 미국의 간섭은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검은 마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태평양 건너 코리아의 수입사에 툭하면 팩스를 날려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그들. 오죽하면 ‘팩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이 다 나왔겠는가. 어쨌든. 중요한 건 간섭하는 ‘마당’에 재편‘집’을 지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이런 일은 왜 생겼는가. (하략)“
- FILM 2.0 '김세윤 기자의 궁금증 클리닉',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을 보는 도중 세 번이나 나오는 하얀 숫자는 뭔가요?」질문의 답변 중

하다못해 광고 하나 만들 때도 제작사나 본사(가령 외화의 경우 스튜디오)가 간섭하는 세상이란다. 애초에 재편집 자체가 넌센스. 즉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더 식겁할 일은 훼손된 장면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잘 알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언론 시사 때부터 훼손된 모습으로 공개되어 왔다니 말 다 했다. 이렇게 흘러간 이상 그 삭제된 장면이 낳는 차이를 확인해 줄 사람은 (기사에 따르면 영화가 원본으로 상영되기 시작했다는) 3월 4일 이후 <블레임>을 본 사람들, 그들뿐이다.

무엇보다 나를 식겁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원본이 훼손되어 노출된 사실 자체에 있다. 나를 포함해 원본이 상영되기 시작한 시점 (즉, 기사 상으로는 3월 4일) 이전에 <블레임>을 본 사람들은 결국 훼손된 <블레임>을 보고 그 영화에 대해 느낀 것들을 마치 이 영화의 전부인 양 평하고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삭제된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다시 확인하지 않고서는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괴상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왜곡된 내용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나아가 관객들이 '한 영화를 온전하게 볼 권리' 차원의 문제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따지고 싶은 게 있다면 ‘(기사가 나온 시점이) 하필 왜 지금이냐!’ 다. 이 기사를 확인하자마자 남은 맥스무비 예매권 총알 한 장으로 온전한 <블레임>을 보려 마음을 먹고 인터넷 예매 창구를 두드린 나는 이내 다시금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다. 2주차에 접어든 시점, 상영되는 극장은 불과 10여 개관. 근처 극장에서는 영화가 모두 내려간 뒤였다.

영화의 제목을 차지하고 있는 블레임(Blame)이라는 단어는 영화 속 전염병 바이러스의 가명이기도 하지만 ‘비난하다, 책임지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전 속 단어이기도 하다. 장담하건대, 지금 상황에서 블레임이라는 단어가 품는 의미는 전자보다 후자 쪽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그래도 스크린 안 블레임(전염병 바이러스)은 끝내 사라지기라도 하지, 스크린 바깥 이미 흘러가 버린 블레임(한 영화를 왜곡했다는 것)은 주워 담는 것 자체가 난감해지는 일 아닌가.

글 | 진사야
2009.03.05

http://www.zinsayascope.com/trackback/122

  1. 2009/03/06 10:22 [Edit/Del] [Reply]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써놓으셨군요. 사실 맘같아서는 환불소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생각입니다. 성질이 뻗쳐서..
    • OpenID Logo 진사야
      2009/03/06 10:28 [Edit/Del]
      페니웨이님, 배급사 (싸이더스fnh) 에서도 참 난감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진짜 (예매권으로 봤다고 해도 억울하겠지만 진짜 돈을 내고 봤다면) 환불 소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건 뭐 상식 밖 안드로메다 세계의 이야기라서 - -;;
  2. 2009/03/06 16:53 [Edit/Del] [Reply]
    헐~~` 20분씩이나 자르고도 영화 내용이 연결되는걸 보면 수입배급사 실력도 대단한데요..ㅎㅎ
    이미 본 사람들은 진짜 환불 받아야 될거 같아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3/06 19:10 [Edit/Del]
      PLUSTWO님, 전 예매권으로 봐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 돈 내고 보신 분들은 정말..ㅠㅠ 억울하실 것 같아요. 더 큰 문제는 그 20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직접 알 길이 많지 않다는 점이죠. ㅠㅠ
  3. 2009/03/06 22:06 [Edit/Del] [Reply]
    페니웨이님 블로그에서 타고 들어왔습니다.

    저도 시사회에서 20분 삭제된 영화를 봤는데.. 다른 분 이야기 들어보니 ㅠㅠ

    20분 붙어 있어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셔서 그냥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수입사가 상영 1회에서 2회 정도 더 늘릴려고 저런 편법을 자행하고 시사회 및 정식 상영을 했다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3/07 08:43 [Edit/Del]
      무비조이님, 상영횟수를 늘려보고자 했던 걸까요 =_= 흠..흠.. 이건 진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부득이한 일로 인터내셔널판과 국내판이 나눠져 있는 경우는 몰라도 이렇게 임의로 칼을 댔다는 건 납득 불가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4. 2009/03/06 22:16 [Edit/Del] [Reply]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정말 화가 나네요. 영화에 혹평을 퍼부은것도 민망하구요. 원본을 보고서도 평에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영화가 끊긴다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는데, 거기 일까요?;;
    • OpenID Logo 진사야
      2009/03/07 08:47 [Edit/Del]
      철이님, 저 같은 경우에는 아마 원판을 봤다고 해도 한 가지 생각은 계속 남을 것 같아요. 리뷰에는 안 적었는데.. 재난 장면이 조금 길다 싶었거든요. 후반작업에서 편집을 했다면 요 재난장면을 좀 더 밀도 있게 편집해서 120분 전후로 하면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아무튼... 정말 이건 예의의 문제입니다. 제작사에 대한 예의이자 관객에 대한 예의라는 차원의 문제. 이번주 주간지 씨네21에 이 관련 기사가 실리는 모양인데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아.. 저도 그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결말에서도 좀 끊기는 점이 있었죠. 추측이긴 합니다만 그게 사실이라면 ㅠㅜ
  5. 2009/03/08 19:58 [Edit/Del] [Reply]
    별일이 다 있군요.

    여긴 영화관 하나도 없어요.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이 없어서 좋습니다.^^
    • OpenID Logo 진사야
      2009/03/08 20:23 [Edit/Del]
      블루팡오님, 이거 뭐 부럽습니다라고 해야 할지...ㅠㅜ 그만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는 거겠죠. 댓글 감사합니다 :D

댓글을 남겨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