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웰컴 투 수수께끼 월드'
INT. 극장 상영관 바깥 - 영화가 끝난 뒤
한 여자가 막 상영관 안에서 밖으로 걸어 나온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오고 싶었던 듯 발걸음이 유독 바쁘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본 후 바삐 출구를 찾는다.
저 앞에 보이는 EXIT 표지판을 확인하고는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걸어가다 발을 멈춘다. EXIT 표지판 옆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눈치다.
여자는 그 사람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간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남자가 말을 건다.
정체불명의 남자
그 영화, 보셨죠? 어땠나요?
슬쩍 미소를 짓는 여자. 금세 그 미소를 걷은 이후 담담하게 말한다.
여자
수수께끼 천국이에요. 그저 이상하죠.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남자의 얼굴이 굳는다. 마치 낭패라는 표정이다. 뒤이어 여자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한다.
여자
어쩌겠어요. 이 영화는 그런 영화인걸요.
위 내용은 바로 영화 <언데드>를 보고 난 이후에 든 생각들을 담은 것이다. 만약 그 어느 누가 이 영화를 어떻게 봤느냐고 묻더라도 내 대답은 항상 같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결과물 자체가 수수께끼에요. 우선 구간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다음으로 그 특성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있어요. 웬만한 강단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는 게 훨씬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고? 이 영화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남을 87분짜리 관객 고문용 게임에 불과하니까.
<언데드>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주요 소재는 바로 디북(Dybbuk)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악령 들린 혼이다. 이 악령은 끊임없이 산 사람들의 영혼을 탐하고, 사람들의 몸에 들어가 그 행동을 조종한다. 쉽게 말해 시도 때도 없이 피해를 입힐 사람 주변인의 몸을 갈아타며 악행을 일삼는 존재. 문득 어떤 영화가 불현듯 머릿속에 지나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해당 영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아무튼 이 위험천만한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퇴마의식으로 혼을 쫓아내야 한다. 이것이 <언데드> 속 이야기의 주요 틀이다.

이 영화의 카피(‘너로 인해 죽은 영혼, 그가 지금 너의 몸을 원하고 있다’)를 보면 흡사 여주인공 케이시 (오뎃 유스트만 분) 로 인해 한 영혼이 생명을 박탈당했고 그래서 그녀의 몸을 원한다는, (우리가 흔히 보아 오고 있는) 복수로 얼룩진 이야기가 연상된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언데드>를 감상하는 데 있어 저 카피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두자. 물론 케이시의 탄생과 관련된 뒷이야기가 배경으로 깔리기는 하지만 이 외의 상황을 놓고 생각해 보면 여러 정황상 그녀와 연결된 구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단지 악령이 케이시의 엄마를 거쳐 그 다음으로 케이시의 몸을 원한다는 것뿐. 그러니까 애초부터 케이시가 지게 된 죄란 그 존재가 극히 미미하다. 아니, 굳이 있다고 하면 쌍둥이로 태어날 뻔했으며 케이시의 탄생과 함께 같이 태어나야 했을 쌍둥이의 반쪽이 생명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것도 (정작 케이시의 행적과는 관련이 없는) 탯줄과 관련된 지극히 생물학적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까 소위 ‘애먼 사람 잡기’ 로 이룩된 구성이 바로 이 게임의 주 특징 되겠다.
여기에 <언데드>는 유태인과 센닥 (게리 올드먼 분) 으로 대표되는 랍비, 과거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비밀 실험을 연결시키는 배경을 끼워 넣었는데 이는 초반부 내용과 불협화음을 초래한다. 초반부 케이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 악령이 순전히 케이시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흘러간다. 관객들이 영화의 흐름을 놓치기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잦아들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내용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여기에 대해서 영화는 전혀 답을 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잔 말 말고 따라오기만 해! 라고. 명백히 불친절한 처사다.
앞에서 이 영화 자체가 수수께끼라고 이야기했다. 이 게임의 수수께끼는 바로 이런 불친절한 이음새가 빚어내는 결과물의 덩어리다. 극의 기승전결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이 수수께끼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적어도 시퀀스 사이사이의 이음새는 매끄럽게 다듬어 놓아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보기 좋게 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밟고 따라오는 관객들을 향한 배려의 역할을 한다. 이런 점을 들어 생각해 보면 <언데드>는 분명 관객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아무리 좋은 구성을 갖다 놓아도 관객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부족하다면 그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언데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야기에 대한 문제에서 공포스릴러라는 장르 자체의 문제로 옮겨간다. 이야기가 허술하더라도 충분히 무서운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면 그나마 좀 나은 반응을 얻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에서도 <언데드>는 관객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비껴간다. 결정적으로 ‘악!’ 소리 나오는 장면이 없다. 공포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공포를 느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처한 문제다. 그 공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데 정작 소름이 빠져 있다. 그저 깜짝 놀라게 하는 충격요법만 존재할 뿐이다.
영화 안팎 모두를 놓고 봤을 때 <언데드>는 분명 나은 점보다 허술한 점이 훨씬 많이 보이는 결과물의 덩어리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느낌이 남아 떠돈다. 특히 그 스산한 스크린 속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허나 결과는 매우 안타깝다. 대체 왜? 이 질문에 대한 답 자체가 수수께끼다. 결국 이 게임의 승리자는 아무도 아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어쩌면 이런 결론 자체가 본 영화에는 없었던 공포를 자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이런 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어서 오세요, 이 수수께끼로 얼룩진 세상에 잘 오셨습니다.’
★
글 | 진사야
2009.03.04
"영화담론 / 긴 영화리뷰" 분류의 다른 글
| 썸머와의 500일 ((500) Days of Summer, 2009) _마크 웹 |
| 페어 러브 (Fair Love, 2009) |
| 더 문 (Moon, 2009) |
| 2012 (2009) - 자네, 왜 뜨거운 돌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나? |
| 호우시절 (好雨知時, 2009) - never. for. ever |

지속가능한 블로깅을 추구하는 진사야의 놀이터입니다. 부디 여기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peace :-)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저정도 능력있는 악령이면 굳이 세상에 안나와도 다 정복할 거 같은데;;;
그리고 아무사람 몸에나 들어가면서 굳이 저 언니를 원하는건 언니가 이뻐서 그런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