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영화가 무례하게 흘러가는 방법'
일전에 나는 <쌍화점>의 리뷰를 쓰면서 ‘정말 보기 싫더라도 졸작을 보게 되면 그 작품이 어떤 이유로 졸작이고 그와 상반되는 다른 작품이 어떻게 좋은 작품인지 보다 명확히 알고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라는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아마 기억으로는 작년 나왔던 영화 <외톨이>를 놓고 한 평론가와 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나왔던 말로 기억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아직 그 이후 그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때 들은 말만큼은 하나의 신조가 되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냥저냥 영화를 보아 오던 예전에 비해 지금 영화를 대하는 관점이 달라진 게 있다면, 남들이 ‘절대 보지 마!‘ 라고 외치는 영화도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이건 졸작이다!‘ 라고 하기보다는 영화를 직접 체험하고 조목조목 따지며 이런 점이 잘못되었고 저런 점이 영화의 장점을 흐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평이 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이리라. 이것은 나아가 영화를 제작하는 곳이나 역사를 놓고 봐도 하나의 재산이 된다.
바로 오늘 ’이런 이유로 남다르게 보게 될 영화‘ 한 편이 추가되었으니 <블레임 : 인류멸망 2011> (이하 ’블레임‘)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감염열도感染列島. 즉 감염 바이러스로 가득 찬 열도라는 의미다. 영화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일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디까지나 가상의 설정을 뒤집어쓴 재난영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부제 속 영단어 ‘Pandemic’ 역시 ‘전국적으로 퍼지는 전염병‘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그 재난의 상황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재난 상황을 보여 주는 것 자체로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재난 자체의 과정과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섣불리 결과만 바라는 차원의 그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적 재난이 발생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 나가는 게 보다 공감을 얻어낼 수 있고 영화가 가지는 의미 역시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블레임>은 어떨까? 영화는 일단 크게 두 구간으로 나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간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는 초반부, 그리고 본격적으로 블레임(Blame, 신의 고통 혹은 벌을 의미)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그 본질을 드러내는 중반 이후다. 극의 초반부에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뒤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 방식 자체에는 하등의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 중간을 채워 넣는 과정이다.
바로 여기서 <블레임>의 무례함은 단박에 드러나고 만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관객의 혼란을 초래하는 점프컷(두 장면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절단을 의미하는 용어. 샷 또는 변화의 매개가 없어 연속성의 상실을 유발한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점. 도쿄 근교에서 바이러스가 퍼지는 모습을 보여 주더니만 어느 샌가 그것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고, 걷잡을 수 없이 전파된 바이러스의 모습을 보여 주다가 갑자기 해결책이 나오는 등. 115분 내내 중간에 들어가야 할 요소들이 거세된 채로 이해불가인 상황이 연속 배치된다.
뒤로 갈수록 그 본질을 더욱 드러내고 마는 이런 유의 부자연스러운 절단면은 연속성의 상실을 유발하며, 나아가 관객들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도 방해 요소가 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들과 연속으로 마주한 뒤 나타나는 결말에서 이 점프컷은 그 정점에 다다른다.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게 될 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여기에 뜬금없이 끼어드는 마츠오카(쓰마부키 사토시 분)와 에이코(단 레이 분)의 러브라인은 이런 불유쾌한 느낌에 기름을 부어넣는다. 누가 봐도 심각한 상황에서 힘 잔뜩 들어간 러브라인이 끼어든다면 그 어느 누가 공감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영화는 소위 ‘공감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시퀀스만으로도 관객의 마음을 붙잡아 놓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면 분명 그 작품은 (하다못해 ’이 장면만은!‘이더라도)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는 모든 영화들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절대 법칙이다.

물론 그 스펙터클이 충분히 충격적이며 놀라운 점도 더러 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하지는 않겠다. 프리프로덕션 기간이 꽤 넉넉했던 것을 증명하듯 재난의 상황을 훌륭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잘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충분히 이 영화가 내세울 가장 큰 특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결정적으로 이런 스펙터클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한 것이 <블레임>이 가진 문제. 그 충격요법만 가지고 있으되 그 충격요법을 흡수하고 수습할 줄은 모르는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얘기한 프리프로덕션상 노력까지 곱게 볼 수 없게 만드는, <블레임>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다.
영화의 예고편에서 WHO 메디컬 담당자 에이코는 ‘일본이 정말 사라지는 거야?’ 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답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 걱정하기 전에 바로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 이는 <블레임>을 보고 느낀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에 대해 생각해 보더라도 <블레임>이 낳은 엄한 결과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할 시간에 보다 침착하게 머리를 써서 난국을 극복할 생각을 해 보면 어땠을까. 펼치는 것은 거창한데 정작 펼치고 나서 머리를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영화. 바로 여기에 있다.
☆
글 | 진사야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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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은 너무 아쉬웠어요. 그 스펙터클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가 분명 많았음에도 그걸 미처 다 살리지 못한 것 같아요. 유독 일본 블록버스터 영화가 고전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작은 영화들 잘 뽑아내는 것만큼 블록버스터도 걸작을 잘 뽑아 내면 좋을 텐데요.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일본이 사라진다' 유의 피해망상적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본의 지리학적 특성 때문일까요? 유독 이런 영화가 종종 눈에 보여서 보기 약간 거북살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아요. 충분히 더 재미있어질 수 있었는데..ㅜㅜ
엉성한 작품을 보고도 차분하게 비판하시는 실력이 대단하네요 ㅋ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영화였어요.;;
글 잘 보고 갑니다~ ^^
그나저나 국내 개봉된 게 20분이 삭제된 거라고요? 하지만 왠지 20분으로는 영화의 빈틈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일본 쪽 반응 포스트가 하나 있네요. http://blog.cine21.com/kojongsoo8318/75863 여기서 확인 가능하십니다 :-)
"무례함"이란 표현이 재미있네요...
과한 욕심이 무례함을 불러왔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