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한 가지 가정을 해 봅시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간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꽤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아마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느낌이라고 한다면 꽤 놀라운 선물을 받은 느낌이 될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 어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폭탄 맞았다!’ 라는 느낌이 들겠지만 반대로 그 기대치 이상이 될 경우에는 어떤 놀라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소위 말해 ‘발견’ 이라는 미학으로 표현 가능할 수 있는 그것이죠. 물론 이 기대치라는 건 매우 상대적인 개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문화적 작품에 대하여 얼마 정도의 기대를 품느냐에 따라서 그 기준은 천차만별로 달라지지요. 한 작품을 놓고 어떤 사람은 가장 높은 기대감을 품을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장 낮은 기대감을 줄 수도 있죠.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제가 이러쿵저러쿵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요. 하지만 그 기대치에 얼마나 보답을 하는가에 대해서 갖게 되는 느낌은 거의 비슷할 수밖에 없죠. 얼핏 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주구장창 기대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야기할 영화 <과속 스캔들>이 바로 이 기대치에 의외로 높게 보답을 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이 영화 제목을 접했을 때, 딱 봐도 뻔해 보이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나요? 과속 스캔들이라니. 제목부터 꽤 자극적인 성향을 띱니다. 소위 관객들을 ‘낚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팍팍 주지요. 덕분에 첫인상부터 웬만하면 멀리하고 싶은 작품들 중 하나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단 이 작품은 ‘제목이 안티‘ 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작품입니다. 제목이 전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소리죠. 내용까지 전혀 아니다 싶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굳이 제목이 안티라는 말을 꺼낸 이유는, 그 속에 담긴 내용이 꽤 쓸 만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비유 가능하죠. 어떤 상자가 있는데 영 포장이 조악하다 이겁니다. 사람들은 포장만 보고 나서 이건 영 물건이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 조악한 포장의 상자를 여니까 정말 예쁜 모양의 그릇 하나가 나왔다 이겁니다. 과연 기분이 어떨까요? 제가 <과속 스캔들>을 보고 난 후 받은 느낌입니다. 약간 덜그럭거리기는 하지만 그 모양새도 괜찮고 제 기능도 다 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꽤 괜찮은 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이야기는 크게 다른 것이 없습니다. 왕년에 잘나갔던 가수 출신 라디오 DJ 남현수(차태현 분)에게 어느 날 황정남 (박보영 분)이라는 22살 먹은 여자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더니 자신이 현수의 딸이라고 우기며 현수의 집에서 같이 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정남이라는 여자는 현수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꾸준히 사연을 보내오던 애청자 중 한 명이고요. 현수는 이 사실을 어떻게든 숨겨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어떤 ‘사고’의 결과물이니 어떻게든 숨기지 않으면 자기 연예인 인생에 치명타가 오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떤 증거 인멸(?)을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중반부로 넘어가도 별 색다른 건 없습니다. 투닥투닥 싸우다가 어느 새 무언가 정이 들어서 나름 꽤 괜찮게 살아가는데 (물론 정남이 현수의 딸이라는 것에 대한 은폐는 여전하지만), 완전범죄가 성립할 수 없듯 이 세 사람에게도 어떤 위기가 찾아들기 시작하죠. 딱 봐도 그림이 그려지는 이야기입니다. <과속 스캔들>은 기존 한국 코미디물의 어떤 흐름을 크게 비껴가지 않습니다. 초반에는 마구 웃기다가 중반부터는 꽤 심각해지더니 후반부 가서는 (어떤 감동 요소 등으로) 한 방 먹이죠.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가 기존 국산 코미디물의 주요 흐름을 다소 전복시켜 특유의 ‘빵빵 터지는’ 코믹물을 만들어 냈다면, 이 작품은 굳이 크게 실험을 하지 않으려 듭니다. 그 고전적 흐름 자체에서 어떤 매력을 찾으려 하죠. 이것이 어찌 보면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최소한 이 작품에서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과속 스캔들>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은 일단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닮았어요. 작품 자체의 흐름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잘 짜여 있고, 그 길을 향해 비교적 잘 흘러가는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물론 가는 길이 정해져 있으니 설계상에 있어 약간의 제한 정도는 존재하게 되지요. 영화는 이 제한선 안에서 취해야 할 제스처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코믹물의 전통적 특성 중 하나인 ‘웃기는 것에 충실할 것’ 에 적절히 부합하면서도 그 코믹 요소 외적인 것을 어느 정도 스크린 안에 끌어넣어 놓는데 이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일체화되어 흘러가죠. 주어진 재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 자체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데 <과속 스캔들>의 미덕은 존재합니다. 어차피 주어진 것이 그것뿐이라면 그것의 특성을 극대화시켜 그것만의 개성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최소한 충무로에 꽤 유효한 교훈이 됩니다. ‘욕심을 부리지 마라‘ 라는 가장 원론적인 메시지에서만 해도 충무로에 줄 수 있는 따끔한 메시지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영화가 부수적으로 제공하는 메시지 또한 꽤 무난하게 잘 먹히는 편입니다. 극중 등장하는 정남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올해 스물두 살인 그녀는 다섯 살 먹은 아들 기동 (왕석현 분) 을 둔, 어쩌다 소위 싱글맘 (내지 미혼모) 이 되어 버린 여자죠. 그녀는 꽤 억척스럽게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가수를 꿈으로 했던 어떤 청춘의 조각이기도 합니다. 중반부부터 그녀는 ‘황제인’이라는 가명으로 현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중 노래자랑 코너에 특별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그것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죠. <과속 스캔들> 속에는 황제인이라는 극중 또 다른 캐릭터에 어떤 마법을 부여해 놓은 흔적이 엿보입니다. 실상 황제인과 황정남은 동일 인물이지만, 동일인물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현수와 아들 기동이 같이 있을 때만의 이야기입니다. 황제인 캐릭터 혼자만 놓여져 있을 때는 어떨까요? 마치 독립된 하나의 캐릭터 같이 느껴집니다. 이 친구가 원래는 싱글맘이라는 원초적 사실 또한 미처 생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니, 아예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아요. 이것이 마치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법 같이 말입니다. 사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싱글맘이라는 부차적인 요소가 무슨 영향을 끼치겠느냐마는(물론 이 사회가 던지는 시선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 황제인이라는 캐릭터는 남현수의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왕년에는 잘 나갔지만 2집 징크스 이후 직하강하기 시작해 미처 자신의 능력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라디오 진행자가 되어 버린 남현수의 영혼은 이 황제인이라는 캐릭터 하에 어느 정도 위안을 받습니다. 즉 황제인 캐릭터는 황정남이라는 여자가 지닌 영혼의 한 조각이기도 하지만, 남현수라는 남자가 지닌 영혼의 한 조각이기도 해요. 두 사람의 영혼이 잘 짜여진 천처럼 직조되어 나온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라디오 속에서 마음껏 능력을 발산하는 제인을 보면서 남현수는 나올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짓고, 그 속에서 어떤 따뜻함이 배어나오죠. 이 요소들이 코믹물이라는 영화의 기본 배경에 이물감 없이 잘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관객들은 어떤 웃음과 동시에 진짜배기 감흥을 어느 정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과속 스캔들>의 이런 특유의 매력에는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들 역시 큰 공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남/제인 역을 매우 괜찮게 소화해 낸 박보영과 황기동 역의 왕석현은 말이죠. 두 사람의 전작을 미처 보지 못한 관객들은 이 작품으로 두 배우에 대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도 꽤 좋은 관전 포인트입니다. 또한 극중 현수가 짝사랑하는 유치원 교사 역의 황우슬혜나, 어떤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정남의 옛 애인 박상윤 역을 맡은 임지규 역시 전작들을 통해 만만치 않은 내공을 발산한 전적이 있기에 반갑게 느껴집니다. 극중 남현수 역을 맡은 차태현이 타이틀롤을 맡고 있지만, 실상 차태현이 크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남현수라는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을 배가시키기 위해 한 발 물러난 모습이 드러나죠. 이것 역시 배우들이 자기 자신의 캐릭터에 잘 녹아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제인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후시녹음상의 아쉬운 점 몇 가지가 발견되는 점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와 캐릭터 간 편중이 다소 심화되어 이것이 다소 역효과로 돌아오는 등 보다 견고했다면 더 좋았을 점들이 발견됩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정말 아쉽습니다. 이 작품이 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죠. 오히려 캐릭터 집약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더 좋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보다 잘 나올 수 있었는데 의외로 못 나온 캐릭터가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임지규가 연기한 박상윤 캐릭터구요. 정남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을 제외하면 큰 기능을 하지 못하고 너무 빨리 사라진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어리버리 청년부터 스토커 기질의 청년까지 (자신이 이 작품에서 펼칠 수 있는 제한선 안에서) 비교적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줬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죠. 이 캐릭터는 보다 깊게 들어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캐릭터는 너무 접근 깊이가 얕아요.
<과속 스캔들>은 의외로 소박한 영화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제목만 보고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생각했다면 한 방 얻어맞기 딱입니다. 자칫 불편한 영화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스크린에 흐르는 이야기 코스도 어느 정도 잘 정해져 있고 그 길을 가는 중간에 무리하지도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호만 맞는다면 꽤 유쾌한 팝콘 무비로서의 역할을 다 하며 관객들 앞에 다가앉습니다. 여기에 배우들이 가진 의외의 에너지까지 가해져 있으니, 크게 대단하지는 않아도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내공의 그것 같습니다. 이미 제 갈 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해 내고도 남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 작품에 가할 수 있는 최대의 고문이겠습니다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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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님도 리뷰 잘 쓰셨던데요 ㅎㅎ 진정 추천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후후
저도 뭐 본 거 적어놓는다는 느낌으로 쓴 건데요 뭘.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
전 그냥 딴이야기 딴소리가 대부분인데 역시.....ㅋㅋㅋ ^^;;
뭐 저도 딴소리를 지향하긴 합니다. ㅎㅎㅎㅎ
트랙백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문가적인 리뷰가 여기있군여~
아직 수련할 점이 많습니다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